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마태복음 5장 38-42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세상적인 표현으로『동해보상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동해보복법』이라고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동해보상법』은 보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피의자가 피해를 입은 자에게『같은 수준의 보상을 하라』는 의미가 된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말했는데, 이는 피의자에게 하신 말씀인데, 피해자에게 말하는 것으로 잘못 받아드려졌다. 남에게 이를 상하게 했으며, 이를 상하게 한만큼, 보상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적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39절 이하에서 피해를 당했을 때, 어떻게 행동을 해야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피의자의 입장에서, 피해를 남에게 입혔을 때는 그만큼 보상하고, 남으로부터 피해를 당했을 때는 용서해 주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로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대한 표현이 된다. 가인은 이스라엘,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이방인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셨지만, 결국 이방인이 먼저 구원을 얻게 된다는 표현이다. 가인은 칠배이었지만, 라멕은 칠십칠배라는 것이다. 가인보다 거의 열배에 해당한다. 창세기 4장 15절에서『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가인을 죽이는 이방인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만,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 사하심을 받으므로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셨다. 이방인에게 구원이 먼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칠이라는 숫자는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피해자의 입장에서, 남으로부터 피해를 받았을 때는 보복하지 말고, 용서해주라는 의미다. 그도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입은 자이므로, 용서해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피의자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계기를 만들어주라는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마태복음 5장에 이어서 6장의 주의 기도문이 등장한다. 여기에도『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태복음 14장 14-15절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사해주신 것은 헬라어의 문법이 과거완료 용법으로 되어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것은 현재진행형으로 되어있다. 시제를 따라서 말하면 앞뒤가 맞지않다.『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있으므로 과거에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다』라는 것은 말이 잘안된다. 그러면『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으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다』라는 말은 시제상으로 부드럽다. 그런데 우리 말의 번역은 시제상 반대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논리적으로도『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해주셨지,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사해주고 하나님이 그것을 근거로 사해준다』는 것은 말이 맞지 않는 것 같다.『하나님이 먼저이지, 사람이 먼저』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서 100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 주지 않은, 1만 탈란드 빚진 자의 비유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다. 35절의 말씀은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14-15절에서 말하는『사람의 과실을 먼저 용서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신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사람의 용서가 먼저이고, 하나님의 용서는 뒤에 나오는 구조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100 데나리온과 1 만 탈란트 빚 탕감과 관련해서 말씀하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비유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데, 형제가 내게 죄를 범했는데, 몇 번을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일곱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는지 물었다.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를 해 주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무한정 용서를 해 주라는 말씀이다. 용서를 무한정 해 주어야 되는지 설명하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 18장 23-35절의 말씀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이 1 만 탈란트 빚진 자요, 형제는 100 데나리온 빚진 자라는 말이다. 1 만 탈란트와 100 데나리온은 비교가 안된다는 말이다. 1 만 달란트는 오늘날로 환산하면 10억 달라 정도의 가지가 있는데, 100 데나리온은 노동자 3개월 정도의 월급(수천불 정도)에 해당된다. 십억 달러와 수천 달러의 비교이다. 따라서 사람에 대해서는 무조건 용서를 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볼 때, 나는 이미『하나님으로 부터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의 죄 문제는 해결이 된 것이다. 이제 탕감 받은 후에 100 데나리온의 문제, 즉『남을 용서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만일 1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1 만 달란트 빚의 탕감은 취소가 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 그 용서를『무효화 한다』는 말씀이지만, 이후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과거에 하나님이 죄를 탕감해 주었던 원래의 위치대로 회복시키겠다는 말이다. 따라서『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었지만『남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남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 자가, 잘못을 깨닫고, 남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경우 하나님은 그 자의 죄를 사하여 주신 과거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형제를 사하여 주는 것은 현재 진행형이고, 하나님이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은 과거형이 되는 것이다.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해주므로 항상『하나님이 나의 죄를 사하신 것이 유효하게 해 주시라』는 말씀이다. 사실 이 말씀은『한번 받은 구원의 역사가 취소될 수 있다』는 말로 비춰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는『최초에 회개하지 않고 말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참된 회개는『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한 자』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스스로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라고 생각해도, 구원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처음 회개했을 때를 돌이켜 보라』는 말씀이다.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회개없이 스스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 외에도『남을 용서하는 것』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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