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태복음 7장 1-5절)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자들에게『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사람들은 자기의 잣대로 쉽게 남을 비판한다. 그러나 자신이 잘못했을 때는 그 비판으로 다시 비판을 받게된다. 사람들은 남을 비판할 처지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원천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죄인에게 비판을 한다는 것이 형평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태도에 대해서 지적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던 이방인이던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인양 이방인을 개 취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6절에서『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이스라엘을 개로 비유한 것이다. 개라고 표현할 때, 개의 습성을 나타낸다. 잠언 26장 11절에서『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이 말은 율법에서 자유함을 주었는데, 다시 율법에 얽매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는데,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주었으며,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었는데, 광야에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종의 멍에를 메는 것과 같은 미련한 일인 것이다. 빌립보서 3장 2절에서『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몸을 상해하는 일은 율법에 따라 육체에 할례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개와 행악 자와 육체에 할례를 받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율법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을 말한다. 예수님은 율법 아래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도 율법에 대해서 다 죽었는데, 다시 율법을 적용받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이 이루신 것을 무시하는 개와 같은 자들이 되는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에서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율법을 지켜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복음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애굽으로부터 나왔는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거의 대부분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이스라엘을 스스로 높이는 자이고, 비판하는 자이며, 이방인은 낮은 자이며, 비판받는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3장 12절에서『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고 바리새인들에게 저주의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있으므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의로운 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말석으로 떨어지고, 예복을 갖추지 못하면 결국 어두운 곳으로 쫒겨난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하늘을 우르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들이다.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므로서 스스로 의롭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인데, 그들보다 더 의로워져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래서 교회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서 믿음을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다. 

누가복음 14장 7-11절에서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자기를 낮추는 것을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을 한다.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님이 잔치 자리에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비유다. 초청하는 사람은 임금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나타낸다. 청함을 받은 자는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이 천하만민의 모델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초대된 것이다.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청함을 받은 더 높은 사람은 초청한 자(임금)의 친구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비판에 대해서, 특히『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형제는 거듭난 자의 형제를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서로 비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비판은 육의 눈으로 바라보고, 자기의 잣대로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듭난 자가 거듭나지 않은 자와 같이 행동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는 부모로부터 받은 육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육정과 싸워야 하는 힘든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육체로 인하여, 형제의 눈에 티가 보이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도 들보가 있을 수 있다. 형제들 간에는 이러한 티와 들보를 서로 협력하여 제거해 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자칫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 문제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의 말씀을 서로 나누고,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 교정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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