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태복음 1장 23-25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고 말씀하셨다. 임마누엘의 뜻은 히브리어 『임』(함께:with)과『마누』(우리와:us)와 『엘』(하나님:God)이 결합된 단어다.『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본래 본 사람이 없으되 하나님의 품속에 독생하신 하나님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품속에 한 영이 있는데,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그 영이 하나님이시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 1장18절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하나님의 품속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니까 그 분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 독생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므로 그 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그 존재 방법에 따라 하나님의 형상을 정의를 한다면 『영』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을 따라』라고 말씀하시는 그 형상은 영을 말하는 것이다.『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이어서『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말이 등장한다. 여기에서 사람이 바로 남자와 여자로 분리되기 전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으로서 첫 사람 아담인 것이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난 분이 예수님이다. 『우리의 형상』이라는 것은『하나님의 영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역사하심에 따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보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사야서 9장 6절에서『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이사야는 한 아기(예수 그리스도)가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영존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의미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는『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본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함께 하시지 않는다. 오직 회개하는 자에게만 함께 하신다. 그래서 회개가 중요하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사도행전 3장 19-21절『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사도 베드로가 구원에 대해서 네 가지를 설명했다.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그러면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르게 된다. 회개는 repent를 말하며, 돌이켜는 be converted, 생명의 변화를 말한다. 그러면 주님이 죄를 씻어주신다.『새롭게 되는 날』에 대해서는 헬라어로, 아나(again)와 푸쉬케(soul)의 결합 용어다. 혼이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예정하신 구원자, 곧 예수를 보내신다.
회개하는 자는 눈이 뜨지며, 어둠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빛으로 들어간다는 말씀이다. 눈이 뜨지기 전에는 아무리 성경을 공부해도, 주님의 뜻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주님을 만날 수도 없는 것이다. 예배는 회개가 아니라 회개한 자가 드리는 마음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눈으로 보지 않고, 단지 귀로 듣기만 하는 것이다. 회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나라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지 않으면 구원받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회개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은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했던 다윗을 불쌍히 여기셔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모든 죄인들은 회개의 기회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회를 잡지않고 강물처럼 흘려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아말렉을 죽이지 않고 돌아온 사울에게는 주님이 불쌍히 여기지 않으셨다. 얍복강 앞에서 주님이 야곱을 불쌍히 여기셔서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모든 죄인들은 회개의 기회를 잡을 수 있지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알 수 없는 긍휼이시다.
회개하는 야곱에게 주님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다. 회개와 거듭남은 다르다. 그러나 분리되지 않는다. 회개하면 거듭나지만 회개없는 거듭남은 없는 것이다. 거듭나야만 죄 사함을 얻게 된다.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이 잘못 인식하는 것이 바로 회개의 문제다. 회개를 죄의 고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나는 죄인입니다. 내가 지난 주에 죄를 지었습니다.』이제 고백했으니『죄를 용서해 주세요』라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눈물로 죄를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또 죄를 짓는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또 참회를 하는 것이다.
자아라는 자기 정체성은 결코 바뀔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그것은 육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부인해야만 한다. 그래서 회개하고 영의 몸을 입어야만 한다. 육의 몸을 부인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정체성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그래서 생명이 바뀌는 것이다. 성령님이 이끌지 않으면 안된다.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는 자는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자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다시는『나』라는 존재를 위해서 살지않게 된다. 오직 주인을 위해서 살게되는 것이다. 주인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시다. 그 분과 연합되는 것이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와 연합되지 않으면 마음이 괴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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