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마태복음 20장 29-34절)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맹인 두 사람은 세상적으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영적으로 말하자면 흑암에 갇혀있는 자를 말한다. 사탄의 굴레에 묶여 있는 자를 말한다. 마태복음 4장 16절『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예수님이 사역을 처음 시작했을 때 이사야 예언을 인용하셨다.
복음의 시작은 사람들이 더러움을 씻는 것이 아니라, 어둠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어두움보다 죄사함을 강조한다. 죄인이 죄사함을 받는다고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어둠에 있으면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죽어있는 것이다. 아담은 범죄한 후 두려워하여 어둠에 숨었다. 내가 주인인 사람은 어둠 속에 숨어있는 자들이다. 자기 생각, 자기 행동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더러움에 있으므로 더러움을 씻으려고만 한다. 더러움을 씻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어둠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 먼저다. 구원의 시작은 내가 어둠 가운데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어둠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은 자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시고, 빛이 비추어져서 어둠 속에 있는 것을 깨닫기를 바랄 뿐이다. 사울왕은 주님의 기름부음이 떠나 가 버렸다. 그 증거로 사무엘이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 주님이 사울왕을 어둠 속으로 버린 것이다. 그래도 상당기간 사울은 왕으로 계속 활동했다. 18년 동안 하나님 없이 전쟁도 다 이겼다. 오늘날도 이렇게 교회 안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세상적으로 잘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다.
거듭나지도 않으면서, 교회 안에 있다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보다 더 불행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다윗도 부하의 아내를 빼앗고 부하를 죽이는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살인, 간음, 거짓말을 행했지만 어둠에 있으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죄사함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죄를 고백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죽는 것이 바로 회개다. 죄로부터 떠나는 것이 바로 회개다. 자기를 부인해야만 이렇게 될 수 있다. 죄를 버리지도, 죄로부터 떠나지도 않으면서 수천번의 죄를 고백한다고 죄가 사라지겠는가?
진리가 자유케하는 것 만이 구원이다. 내가 진리를 공부한다고 자유케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으면 진리 속에 있는 것이다. 나로부터 진리로 주어가 바뀌어야만 된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면서 예배하는 생활을 했지만 진리 안에 거하지를 못했다. 그래서 영적 감각을 잃어버려 자신이 악한 존재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빛을 비춰주셨다.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말씀의 빛을 비추어서 깨닫게 해 주셨다. 오늘도 말씀의 빛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영이 죽어있는 자다. 작은 탐심이 죄의 시작이다. 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있어도 작은 탐심 앞에 무너지고 만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득 채우고 예배로 올바른 감정을 가지고 있더라도, 작은 탐심 하나가 죄의 종으로 몰아간다. 다윗이 가진 작은 탐심 하나가 엄청난 죄로 몰아간 것이다. 그래도 다윗은 자기가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게 어둠이다.
마태복음 9장 27-31절에서도 두 맹인 이야기가 나온다. 본문인 마태복음 20장 29-34절의 내용과 유사하다. 그러나 차이가 있는 것은 9장은『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그러나, 20장은『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지, 소문을 내어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제자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제자의 본질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삶이다.
마가복음 8장 22-26절에서 예수님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마을에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하셨다.『말을 퍼뜨리지 말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8장 40-56절에서 예수님이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셨는데,『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하셨다. 마가복음 7장 31-37절에서도 예수님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치셨는데, 예수님이『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라고 했는데,『더욱 널리 전파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왜『말하지 말라』라고 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태복음 17장 1-9절에서도 보면 예수님이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는데,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하늘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것을 제자들이 보았는데, 예수님이『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떤 일을 하셔야 되는데, 그 일을 이루기 전까지는 그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표적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온전하게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복음을 이루시기 전에는 그『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표적은 그 표적 안에 나타난 기적들을 전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표적 안에 내포하고 있는『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어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라는 것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루기 전까지는『본 것을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26절에서『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라고 했다. 표적을 보았으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기적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자, 예수님은『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수 없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든 표적이 바로 이러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이런『십자가 위에서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기 전에는 표적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위대한 십자가의 죽음과 삼일만의 부활사건』이 기적이라는 사건때문에 그 중요성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어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증거해야』만 하고 그 외의 것은 의미가 없는 증거인 것이다. 기적으로 병을 치료하였다든지, 또천국의 환상을 보았거나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이라든지, 지옥을 보고 왔다든가 라는 말들은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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