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된 자
갈라디아서 3장 22-23절『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믿음이란 어떤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과 관계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믿음의 대상으로부터 관계적 신뢰가 오는 것이다. 일방적인 것은 믿음이 아니다. 짝사랑이 사랑이 아니듯이 사랑은 상호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이것을 모른다면 일방적인 생각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마음을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상호신뢰 관계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죄인은 신뢰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 사이에 화목관계가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악한 마음의 돌이킴을 통해서 화목되어진다. 하나님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하셨다. 그 다음은 죄인이 반응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화목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죄인의 반응은 악한 마음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돌이키는 것은『자기부인』이라는 용어로 설명된다.『자기부인』은 하나님 말씀과 반대되는 모든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마찬가지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떤 사실을 알고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신뢰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믿는 자라는 것이다. 옛사람의 옷을 벗고 들어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는 그의 믿음과 결부되어, 하나님이 예수 안에 있는 자도 살리신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는 삼위의 하나님 중 여호와였지만,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보좌의 하나님 아들이 된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해서 진노의 심판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마가복음 15장 34절에『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그러나 누가복음 23장 46절에서『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린신 것을 알았지만, 다시 살리시는 것도 믿고 있었다.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며,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바로 이 같은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이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같은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자신이 죄 아래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들어와라는 것이다. 갇혀있는 자가 풀려나기 위해서는 믿는 자도 자기부인을 통해서 죽음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서 로마서 6장 7절의『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가 적용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어, 심판을 받는다. 노아시대의 방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해준다. 방주가 완성되는 순간 심판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만 하나님의 심판이 눈에 들어온다. 모든 사람들이 심판 아래 있는 것을 깨닫는 자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다. 심판 아래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다는 뜻이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율법 아래 있는 자가 저주 아래 있는 자가 된다. 3장 12-13절에서는『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속량이라는 말은『샀다』는 뜻이다. 사도바울은 신약에서 네번 이 말을 사용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두번 사용했는데,『저주를 받은바 되사』가 바로『값을 치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저주에서 회개하는 자를 사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게 죽으셨다. 그 죽음은 바로 죄인들의 죽음인 것이다.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죄인들이 심판받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회개한 죄인들도 죽었음을 보시고 속량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자신은 죽기 위하여),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셨다. 회개하여 십자가에서 연합되는 자는 그의 죄가 죽은 예수에게로 전가되어 예수의 죽음이 죄인의 죽음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죄도 전가되고 의도 전가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상호관계를 통한 믿음이 된다.
믿음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죄인은 반드시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회개를 죄의 고백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을 일방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너무 쉽게 생각한다. 내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 전하는 많은 사람들도 옛사람의 옷을 벗는 중요한 말은 하지 않고,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받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회개하여 옛사람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는 2천년 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다. 회개하는 자만 은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의 능력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여전히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회개하는 자를 예수의 피값으로 사신 것을 속량이라고 한다. 이것은 새창조가 된다. 인간의 어떠함이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새창조는 오직 회개하는 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과 힘은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다. 새창조는 거듭남을 말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옛사람의 옷을 벗는 일 외에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와 함께 죽은 자만 예수와 함께 살리신다. 살리는 것은 영이다. 육을 강조하는 자들도 있지만 살리는 것은 영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살리는 것이 새창조이고 거듭남이며, 새피조물이 된다. 이것을 위해서 사람들은 옛사람의 옷을 벗는 회개를 해야만 한다.
새창조는 오직 회개하는 자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탄은 회개와 거듭남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로마서 6장 6-8절에서『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아담과 하와를 통해 태어난 자들은 모두 옛생명이다. 옛생명은 죽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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