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마태복음 19장 13-15절)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시는 자를 통해서 예배받기를 원하신다. 삶의 현장에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예배는 사람들이 주일이라고 정한 날만 하는 것이 아니라『주는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항상 삶의 현장에서 단을 쌓는 예배가 있어야 한다. 야곱은 도망가다가 어느 장소에서 꿈을 꾸는데,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와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된다. 야곱의 영이 전심으로 하나님나라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돌베개를 세워서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다. 삶의 현장이 돌기둥을 세우는 성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존재였음을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게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배는 승리다. 도망자의 삶을 사는 야곱인데도 그 곳이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되는 것이다. 일터와 가정에서 전심으로 예배하므로 그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내 백성으로 예배하게 하라』라고 하셨다. 놀랍게 바로왕이 말한다.『그냥 애굽에서 예배하라』라고 했다. 주님이『안된다』고 하셨다.『삼일 길을 가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셨다. 삼일 길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 세상에 대해서 단절되어 죽은 가장 귀한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예배를 드린다고 표현하고 있으나 예배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시간이든 세상과 단절된 시간 속에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다.
애굽으로 부터 삼일 길을 떠나라고 주님이 명하셨다. 주님은 예배를 위해 기적을 주시고, 히브리 백성을 괴롭히던 애굽의 신들을 심판했다. 우리가 예배에 집중할 때 우리를 괴롭하게 만드는 사단의 세력을 주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예배를 막는 상황 속에서는 반드시 사단이 역사하고 있다. 그러나 전심으로 부르짖을 때 사단이 막는 환경을 주님이 해결케 해 주실 것이다. 환경이 어려워서 예배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안하기 때문에 환경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광야에서 너를 낮추시고』 바로왕의 노예로 사는 것처럼, 세상 일때문에 낮아지는 것으로 받으시는 주님이 아니다. 주님은 예배로 우리를 낮추신다. 예배는 세상일 때문에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높혀주기 위해 우리가 낮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예배의 삶이다. 예배는 주님을 높이고 우리를 낮추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일 때문에 낮아지지 아니하고, 주님으로 인해 낮아지는 예배의 자리로 가야한다. 그러면 주님이 시험하신다. 낮추시고 시험하사 너희 마음이 어떠한지를 주님은 알기 원하신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핑계대지 아니하고 순종하는지 주님은 알기 원하신다. 그래서 예배로 부터 순종이 나온다. 세상 일로 인해서 상처를 받더라도 주님께 순종하는 예배가 나오는 것이다. 주님의 시험은 아무나 하시는 것이 아니다. 시험은 준비된 자에게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마귀의 시험처럼 넘어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게 하는 시험이다. 오직 예배로 주님을 높이고 우리가 낮아질 때 주님이 시험하시는 것이다. 그 시험은 오직 주님께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시는 시험이다.
시험이 지나고 나면, 신명기 8장 16절에서『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시험의 끝은 복이라는 말이다. 시험은 넘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이다. 그래서 감사해야만 한다. 예배는 바로 이런 것이다. 신명기 8장 3절에서『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방황했던 곳이 광야다. 광야는 물이 없는 곳이다. 광야는 세상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40년간 방황한 이유는 가나안 땅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나안에 정탐하러 간 열두명이 40일간 정탐했는데, 열명이 들어가면 죽는다 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1년을 하루로 계산해서, 40일간 정탐기간을 40년간으로 계산해서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40일간 굶주린 것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백성들이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한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이 굶주리신 40일간(광야의 40년간)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의 세상에서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명의 양식이 없었던 것 처럼,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다시 오실 마지막 때는,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이 없어서 굶주리는 것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있지만, 말씀을 먹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모스 8장 11-12절에서『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예수님이 40일간 굶주린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하나님 말씀에 굶주린다는 것이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모두 굶주리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맛나가 있었음에도, 먹을 고기가 없다고 불평한 것이다. 예수님이 온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지 않으면, 생명의 양식을 먹지 않은 것이다.
신명기 8장 16절의『낮추시고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려하심이라』마침내 라는 말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마침내는『너의 끝에』라는 말이다. 시험받을 때 우리의 끝에 온다. 시험받을 때는 내 지혜 내 능력, 내 인내에 한계가 온다. 더 이상 길이 없음을 본다.
그런데 시험을 통과하는 자는 거기서 육적인 우리가 죽는 것이다.『In your end』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시점에서 화가 나고 성질이 나는 것이다. 시험의 끝에 자아가 죽지 않으면 순종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마침내』라는 말이다. 주님의 시험에서 우리의 끝에 이르러야만 한다. 그럴 때 복이 임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상황에 있는가?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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