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마태복음 21장 1-9절)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구원하소서』를 뜻하는 히브리에서 유래한 말이며, 기쁨과 승리를 표현하는 말이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여호와여, 호산나』(시편 118:25)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시편 118:26)라고 부르짖으며 찬양하였다. 이 구절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의 축일에 찬양했는데, 호산나를 외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위의 시편 구절(118:25-26)을 되풀이하면서 나뭇가지를 길에 깔고 예수님을 환영하였다. 
이 땅에서 예수의 이름은 하나님 나라에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아무나 하나님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회개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 예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로마서 10장 13절『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여기서『부르다』는 말이 헬라어『에피칼레오마이』라는 말이다. 사도바울이 세례받을 때 사도행전 22장 16절에서 아나니아가 말한 것이다.『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그리고 로마서 10장 9-10절에서『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교회 다니는 사람이면 이 말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디모데후서 2장 19절에서『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여기서 주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이름이다.『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받았느니라』가 아니라『불의에서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부른다』는 말이 헬라어로『오노마저』라는 말로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말이다.『에피칼레오마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가족(surname)으로서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뜻이다. 그런데 대부분 교회 사람들이 아들도 아니면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은 예수의 가족이 아니면서『주』라고 부르고 있다. 거듭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거듭났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회개하여 자기부인의 삶의 살지 않으면 거듭난 삶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주의 백성이라고 우기는 것이다.『믿습니다』라고 말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야 구원받는다. 거듭나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거듭남의 핵심은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그러면 씻음을 얻는 것이다. 로마서 6장 7절에서『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 것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옛사람은 광야에서 죽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죽은 예수와 연합되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죽은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 바로 성찬에서 잔을 마시기 전에 떡(예수의 몸)을 먹는 것이다. 죽은 어린양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날로 먹지말고, 삶아서 먹지 말고, 불로 구워서 먹으라고 말한다. 남은 것은 불로 태우라고 했다. 

오늘날 면죄부 같은 거짓복음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리고 전해야만 한다. 신명기 30장과 로마서 6장, 10장의 말씀으로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거짓 복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나는 너를 모른다, 너는 누구냐?』라고 말할 것이다. 이들은 입으로는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이다. 마태복음 7장에서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예언하고 능력을 행했다』고 말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날에 내가 밝히 말하기를 나는 너를 몰랐는데 너는 누구냐』라고 말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태복음 7장 24-29절)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다.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믿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와 하나가 되는 자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는 자가 아니다. 오직 십자가의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자들이었다.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바리새인들은 마치『주여 주여 내가 선지자 노룻도 하고, 귀신도 쫒아내고 하는 무엇인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은 이 비유를 통해서 오직『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구원을 얻었다고 믿으면서, 날마다 회개해야만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의지를 포기해야만 구원받는데,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만 구원받는 식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다. 날마다 회개해야만 한다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은 자들이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죄를 세상에서 짓는 죄로 생각한다. 죄는 하나님 나라를 떠난 것이 죄다. 그래서 돌이켜서 돌아가는 것이 회개다. 즉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그런데,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반성하는 것을 회개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죄를 회개하지만, 하나님께는 회개한 자가 아닌 것이다.『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탐욕(옛사람)으로부터 돌이키는 것이 회개다. 그래서, 로마서 6장 6-7절은 옛사람이 죽어야만 의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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