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누가복음 13장 31-35절)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자리를 피하라고 말했다.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헤롯은 헤롯 대왕의 아들인 안티파스를 가리킨다. 누가복음 3장 1절에 따르면 이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있었고, 그의 동생 헤롯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있었다. 예수님의 활동 무대가 이 헤롯 안피파스의 지역과 겹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일종의 망명을 권고한 것이다. 예수님을 꽤나 생각해주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위협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헤롯의 명령을 전달했거나 아니면 헤롯을 핑계로 예수님에게 겁을 주는 것이다. 당시에 헤롯이 예수님을 불편하게 생각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예수님과 헤롯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복음 9장 7-9절에 나온다.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또는 엘리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가 다시 살아난 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소문을 들은 헤롯은 마음이 꺼림칙했다. 누가복음 9장 9절에서『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제 이런 일이 들리니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며 그를 보고자 하더라.』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인 사건은 마태복음 14장 1-12절과 마가복음 6장 14-29절에 자세하게 나온다. 세례 요한은 헤롯이 동생 빌립이 죽자 그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한 일을 대놓고 비판했다. 그 일이 빌미가 되어 결국 요한은 참수를 당했다. 

세례 요한은 당대의 의인이자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선지자였다. 시대의 양심을 깨우는 광야의 소리였다. 예루살렘과 유대의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 와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님도 그렇게 세례를 받았다. 사람들은 요한을 보고 메시야가 아니냐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 요한의 목을 벤 헤롯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상상이 간다. 그가 예수님마저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바리새인들을 보내서 막판 절충을 시도하는 것이다. 
헤롯 왕가는 원래 악명이 높았다. 헤롯 안티파스의 아버지는 그 유명한 헤롯 대왕이다. 

헤롯 대왕은 마태복음 2장에 등장한다.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은밀한 거래를 시도했다. 아기 예수를 찾으면 고국으로 돌아갈 때 자기에게 알려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헤롯에게 알리지 않고 돌아갔다. 헤롯은 두 살 아래의 신생아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헤롯 안티파스는 아버지 헤롯 대왕의 광기를 물려받은 것처럼 보인다. 

당시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세례 요한의 환생으로 보았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로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 대답은 헤롯이 듣고 불편하게 생각했던 그 내용이다.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다시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여기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질문, 즉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선지자라는 대답이다. 세례 요한, 엘리야는 다 선지자들이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는 데는 일치한다. 유대교도 그렇고, 이슬람교도 그렇다. 선지자의 역할은 크게 보면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이다. 세례 요한과 엘리야, 그리고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 성서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은 모두 고유한 영적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다른 하나는 개인과 사회의 도덕적인 개혁이다. 선지자들은 일종의 혁명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았다는 것은 일리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을 바르게 변화시키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헤롯은 이런 선지자 전통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로 인해서 왕 중심의 질서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왕은 그걸 용납할 수 없았다.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은 왕들과 긴장관계에 있었다. 같은 종교적인 기능을 감당했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입장이 달랐다. 제사장은 보수적이어서 왕정 체제 안정에 기여한 반면에 선지자들은 계속해서 왕정과 투쟁했다.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왕의 절대 권력에 도전했다. 

예수님은 분명히 선지자 전통에 서 있는 분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고 생각했을 리가 없으며, 헤롯이 아무리 여론에 민감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생각했을 리가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증거다. 십자가 처형은 정치적인 제도다. 유혈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이 주로 그런 방식으로 처형당했다. 로마제국은 혁명에 참여했던 수천 명의 노예나 평민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기도 했다. 예수님은 결코 유혈 혁명가가 아니시고, 정치적 주도권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이시다. 그러나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그런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들이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만은 분명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둘째 대답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나온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이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이 대답이 왜 선지자라는 대답과 차원을 달리하는지, 유혈혁명보다 더 강한 변혁의 힘이 있는지, 그래서 당시 최고 권력을 행사하던 헤롯 안티파스를 두렵게 했는지를 알려면, 즉 헤롯이 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마음먹었는지를 알려면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더 실질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왕은 인간 욕망의 최고 정점이다. 왕들이 왕 노릇을 하도록 하는 것은 민중들의 욕망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초기 기독교의 고백은 왕을 정점으로 하는 사람들의 물질적 욕망 체제에 대한 거부였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에게만 붙는 퀴리오스(주)라는 타이틀을 예수님에게 돌렸다. 구원은 로마 황제나 헤롯왕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고백이다. 이게 선지자 전통과의 근본적인 차이다. 선지자들은 기존 체제를 인정하고 변혁을 요구했다. 때에 따라서는 혁명까지 요구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모두 기존 질서를 전제하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거부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뜻이다. 

헤롯과 같은 악하고 포악한 왕들은 기독교 신앙을 거북하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제압하려고 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헤롯과 같은 위협을 크게 두려워한다. 세상이 요구하는 삶의 기준에서 밀려날까 하는 두려움이다. 헤롯이 위협하든 말든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도 이와 같이 항상 장대에 높이 들린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만 완전하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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