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로마서 2장 6-15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장은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구원사역과 인간의 참상을 낱낱이 파헤쳤다. 인간의 참상은 대단히 동물적인 욕구들, 형이하학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2장 1-15절은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죄를 폭로한다.『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사도바울은 우선, 형이상학적인 죄를 다룬다. 형이하학적 죄는 단번에 드러나지만, 형이상학적 죄는 은밀하여 자칫 은폐되기 쉽다. 죄는 발현된 것뿐만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내면화된 것도 죄다. 예수님께서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며, 음욕을 품는 것으로도 곧 간음했다고 선언하셨다.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신다. 

십자가에 높이 들린 인자를 바라보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높이 들린 죄의 몸을 하고 있는 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자기 십자가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오직 자기는 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 요구하는 것이다. 자기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만 구원받는다. 그래서 날마다 십자가의 인자를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는 누군가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의 고난도 포함될 것이지만 먼저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죽고 죽고 살리라』는 말을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 나라를 떠나 이 땅에서 살게된 것이 일차적 영의 죽음이다. 그리고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 이 땅에서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것이다. 누구나 둘째 사망을 거쳐야만 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주신다. 이 땅에서 둘째 사망을 거치지 않는 자는 육을 벗을 때, 음부에서 둘째 사망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남기신 유언은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성경은 오직 판단과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라고 말한다.『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하나님은 심판과 판단을 통해 생명을 살린다. 인간의 판단은 그저 비난하고 파괴할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끝까지 사랑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시기에 심판자이며 또한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하나님은 오늘도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십자가의 은총을 누리기를 기다린다.

7, 10, 13절은 율법과 선의 행함을 강조한다. 성도는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간단한 도식은 복음을 크게 훼손했다. 행함은 구원의 조건일 수 없지만, 구원의 증거가 된다. 율법을 부지런히 지키던 청년이 예수께 와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율법을 지킬 것을 명하는 예수님께 그리 살았다 대답했다.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시나, 부자 청년은 근심하며 자리를 떠났다(마 19:16-22). 

선의 정의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선을 행하는 일이다. 선에 대해서 하나님 만이 선하시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자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시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될 때 선하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폭로하는 두 번째 죄는 양심의 힘을 믿는 죄다. 율법이 오기 전, 모든 이에게 양심은 있었지만 죄를 막지는 못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동생을 죽이고 이를 은폐했다. 하나님의 추궁과 심판에, 자신에게 표를 주어 타인이 자신을 해하지 못하도록 부끄러운 요청을 했다. 그는 양심이 있었으나 죄를 이기지 못했다. 당대의 의인, 노아를 제외하고 모든 인류를 이 땅에서 멸절시킬 때 그들은 양심을 지녔다. 하지만 양심은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다. 성도는 내면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아는 자들이다. 그래서 양심이 살아있는 자는 회개하여 말씀과 복음을 기준으로 살아간다. 회개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사도바울은 그가 전한 주님의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복음에는 복주시고 형통하게 만드는 주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은밀한 것을 드러내고 심판하시는 주님이 등장한다. 바울은 이를 부끄러워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주님과 대면하여 살아가는 자신에게 더 이상 부끄러움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다했다(빌3:8). 

바울은 가장 소중한 것임을 만나서 누렸기에, 주님의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 고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각종 고초가 기다린다는 예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중해 연안을 누비며 로마로 그의 복음을 들고 당당히 들어갈 수 있었다. 주님의 복음이 나의 복음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나의 복음이 된다. 

로마서 6장 4-6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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