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로마서 2장 16절)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바울이 복음이라 말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이다. 사도행전 17장 30-31절에서도『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격려와 용기를 북돋워 주는 사랑의 하나님을 소개한다.『세상의 모든 것은 소멸되고 바뀌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고 말한다. 복음은 사랑을 전하는 것인 것인가 아니면 심판을 전하는 것인가? 누가 중심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인간 중심은 늘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은 죄인을 바라보는 심판자이시다. 그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생각하는 자는 미혹에 빠진 자다. 

사도바울이 17장에서 말한 곳은 그리스 아테네, 아레오바고 라고 하는 곳이며 종교재판을 하는 장소였다. 하나님이 온 우주와 땅을 창조했다고 바울은 설교한다. 그런데 설교의 마지막에『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생명과 호흡을 주셨지만 알지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지만 이제는 어느 곳이나 모든 사람에게 명령하여 회개하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는『예수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이 말은 회개한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선물이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는『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하나님이 계시의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시기 전에는 율법 아래 갇혔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라, 자기가 믿는 믿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회개하지 않은 자의 믿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는 자의 믿음이다. 병 고치는 믿음, 귀신 쫒는 믿음은 어려운 환경을 해결하는 믿음이지『변화되는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단이 하나님의 계시될 믿음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 믿으세요』가 아니라『회개하라』다. 알지 못하던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을 때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오신 후는 다른 시대다. 사도행전 17장 31절에서『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사도바울이『정하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했다』고 말했다. 

구약성경은 에덴동산으로 부터 쫒겨난 아담부터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이스라엘을 마지막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신다는 말이다. 유대인에게 샤밧이라고 하는 그 날(The day)이 있다. 7월 10일 욤키프(대속죄일) 그 날을 놓치면 주님이 심판하기 때문에 유대인에게는 중요한 날로 여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늘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신약은 구약에서 말하는 그 날에 하나님이 정하신 그 사람이 온 천하를 공의로 심판한다는 말이다. 그 사람이 바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이 그를 죽였지만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주님이『모든 사람이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다』고 말한다.『복음』이라는 말은 『좋은 뉴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 큰 기쁨의 좋은 소식 때문에『좋은 뉴스』라는 말이 되었지만『그 날』이라는 소식은『충격적인 뉴스』다.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 생활하고 스스로 믿음이 크다라고 생각해도, 변하지 않은 믿음은 구원할 수 없는 죽은 믿음이다. 영이 죽은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는 것 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자라는 말이다. 그 행함은 바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왜 바울이 구약도 모르는 아테네 사람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심판의 말씀을 전했는가? 창조주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푸신다. 악인의 밭이나 의인의 밭이나 동일한 햇빛과 비를 주신다. 창조주는 처음부터 사랑을 나타내신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게 되었다.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복음이 필요한 것이다. 

죄를 진 첫 인간에게는 필요한 복음은 가죽옷이었다. 어린양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게 충격의 소식이었다. 첫 인간의 죄는 용서받지 못하고 에덴동산으로 부터 쫒겨났다. 에덴동산은 죄인이 들어올 수 없게 불칼을 든 천사가 나타난 것이다. 에덴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단 하나 불칼을 맞고 죽어야만 되는 일이었다. 죽는 것이 바로 심판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죄만 사하심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복음은『주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와 함께 죽었음을 믿는 자에게만 대속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죽었으면 세상에 대해서도 죽어야 하는데,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면, 함께 죽었다는 믿음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 어떻게 될까? 

모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시내산으로 올라갔다.『백성은 올라가기 전에 시내산에 올라가면 죽으리라』라고 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갈 수 없다. 죄는 죽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와 40년간 광야에서 생활할 때 사용할 성막을 만들었다. 성막에 피 흘리심이 없이 들어가면 죽는다. 피 흘린 후에 물두멍의 물로 씻지 않으면 죽는다. 에덴동산을 지키는 천사의 불칼과 시내산의 법은 동일하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 앞에는 회개하기 전에는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죽어야만 다가갈 수 있다. 회개는 육적인 것이 죽는 것이다. 죄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오직 회개한 자가 구원주로서 만날 수 있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는 아무나 창조주를 만날 수 있을 것처럼 설명한다. 창조주와 구원주에 대한 개념을 알고있지 못한듯 하다. 창조주는 모든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지만 죄인인 인간은 창조주에게 다가갈 수 없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지만 죄인인 인간은 창조주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창조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를 강조하고 있다. 마치 죄인이 창조주를 만날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혹이다. 창조주 주님은 죄인인 인간에게는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주 하나님 만이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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