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


(로마서 4장 4-12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만 한다. 율법은 행위를, 복음은 믿음을 내포한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의미다. 그런데 믿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자기의 의에 빠질 수 있다. 믿음은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육으로 반응하는 자기, 이를 부인하는 믿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 인정받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75세에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친척 롯을 데리고 나온다. 약속의 자녀를 주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이스마엘을 낳았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99세 때에『내년에 약속의 자녀를 주겠다』고 말하는데도 속으로 웃었다. 이전의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는데 25년이 소요된 것이다. 로마서 4장 19절에서『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그래서 4장 23-24절에서『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믿기만 하면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브라함이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이 되는 것처럼, 믿는 자는 예수와 함께 죽은 자가 되어야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이다. 믿음은 쌍방간 약속의 이행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육으로 반응하는 자기는 내면에 탐욕이라는 우상이 있다. 하나님은 우상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우상은 무엇인가? 권력, 명예, 돈, 자녀, 그러나 그 우상은 자아다. 자아의 내면에 숨겨진 탐욕이라는 우상이다. 권력, 명예, 돈, 자녀의 문제는 탐욕이라는 우상이 사람의 행동으로 나타나서 표현된 것 뿐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성경(디모데전서 6장 10절)은 표현한다. 돈을 탐내는 자들이 미혹을 맏아서 믿음으로부터 떠난다고 바울은 표현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7장 24-27절에서『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유는 여자의 자아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7장 28절에서『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자아를 버리지 않으면 이런 말이 나올 수 없다. 그때 예수님이 마태복음 15장 28절에서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이 믿음을 위해 예수님은 여인의 자아를 죽이도록 유도하셨다. 자아를 죽이는 것이 회개다. 회개없는 믿음은 없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그 믿음이 자기의 생각대로 믿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믿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대로 믿는다면 여전히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자기 생각대로 믿는 것은 여전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에 있는 것이다. 세상의 육신에 머물고 있으면 아무리 오래 교회 생활해도 율법의 사고를 벗어날 수 없게된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믿는다면 말씀 앞에서 자아를 부인해야만 한다. 신령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고 말을 해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육신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를 주겠다고 말씀해도, 자아가 처리되지 않는 모습을 본다. 자아가 처리되지 않으면, 남들이 보기에는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이성과 지식과 경험이 적용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 상황이 올 때 믿음의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로마서 4장 19-22절에서『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구원은 100세가 되어 이삭과 같은 새생명을 얻는 것이다. 

로마서 4장 3절에서『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믿는다는 말 때문에 오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에서 믿음은 아브라함의 75세 때의 믿음이 아니라, 백세 때의 믿음이다.『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가 중요하다. 창세기 15장 4절에서『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그 사람은『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메섹은 갈대아 우르의 바벨론을 말한다. 

15장 4-6절에서『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여기에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여기에 이르는 것이다. 아브람『자신의 의』로는 믿음에 이르지 못한다.『그의 의』라는 것은 아브람 자신의 의를 말한다. 하나님이 주시는『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16장 2절로 가면『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이 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자기의 의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왜 자기의 의에 빠져나오지 못하는가? 자아를 하나님 말씀 앞에 세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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