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로마서 5장 2-4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1-3장을 읽지 않고, 로마서 4장으로 건너 뛰면 문제가 생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단순히 가르치거나 듣기 때문이다. 믿음은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런 믿음은 환경이 해결되는 믿음이 될 수 있다. 믿기만 하면 병도 나을 수 있으며, 풍랑을 가라앉을 수 있다. 그러나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의 공로와 연합되어야만 구원받는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은 회개를 통한 내적변화가 뒤따르게 된다. 이게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옛사람은 죽고 새새람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로마서 6장에서 세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사도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를 하는데, 로마교회 사람들의 영적 상태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들임을 말한다. 6장 1-2절에서『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죄의 원인인 악이 죽는 것이다. 악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는다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게 세례라는 것을 3절에서 설명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는 것이 우리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죽음은 바로 내적 악의 죽음을 뜻한다. 이게 옛사람이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욕망이라는 것이다. 회개하여 우리의 내적인 옛사람(악)이 죽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새생명(새새람)으로 살리신다는 것이다.
6장 4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회개는 돌이키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버나움과 벳세다에서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었지만, 아무도 회개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이런 기적을 행했으면 회개했을 것이라고 하신다. 그만큼 예수님의 고향과 가까운 가버나움과 벳세다의 사람들은 악한 상황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회개는 옛것(악)과 단절하는 것이다. 그래서 단절을 죽음으로 표현한다. 이것을 예수님은 자기부인으로 설명하셨다.
이 죽음을 구약의 출애굽기에서 설명하신다. 어린양의 피를 칠하지 않으면 다 죽는 것이다.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지만, 히브리 백성들은 죽지않고 애굽을 나오게 된다. 이제 애굽과 단절되는 것이다. 홍해바다를 건널 때 애굽과 완전히 단절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다. 이렇게 애굽을 나와 광야로 왔지만, 히브리 백성들은 길이 험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히브리 백성들의 회개는 광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애굽은 히브리 백성이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이 애굽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은혜를 베푸셨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보여주신다. 삼년간 온갖 기적을 경험하게 하고, 체험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으므로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다.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다 옛사람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옛사람의 속성이 바로 육체 속에 감추어진 악이라는 것이다. 이 악이 바로 자기가 주인 노릇하게 만든다.
히브리 백성이 애굽을 나온 것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삼년간 예수님과 함께 한 기간이나, 오늘날 누군가의 인도로 교회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나 같은 모양인 것이다. 그들은 다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을 배반할 자라는 것이다. 구원은 히브리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출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이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사람들도 회개하여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수가 주인이 되는 것이 바로 회개라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가 주가 되어야만 구원받는다. 예수가 주가 될 때『주님이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하리라, 나로부터 빼앗을 자가 없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을 말한다.
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회개하고 있는가? 자기를 정결하게 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자기를 부인하려고 하는가? 자기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만 되는 것이다. 어린양이 먼저 죽어야 그 피를 통해서 죄 사하심을 얻는다. 먼저 어린양의 죽음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게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 된다.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은 옛사람은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만 그 믿음으로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가나안이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들어간 히브리 백성들이 가나안에 있는 족속들과 싸우는 일들이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내적 생명 변화와 같은 것이다.
교회 사람들이 거듭남에도 육체로 비롯된 속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성령의 법을 따르는 한 지체(영)와 육체를 따르는 한 지체(혼)가 싸우게 되는 것이다. 영혼 일체설을 믿는 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바로 영과 혼을 하나의 일체로 생각하기에,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넘어지지 않기 위해 성화를 이루어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과 혼의 분리를 믿는 자들은 혼을 부인하므로, 영적 존재가 되어 구원받고 이것을 성화로 생각한다. 내적변화는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또 다른 자기(혼)의 부인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바로 열매맺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 백성들은 애굽을 나와 홍해바다를 건넜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므로,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광야에서 태어난 자를 제외하고는 다 죽었다.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새생명들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으로부터 광야로 나와서 유월절을 지켰지만, 가나안에 들어간 새생명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유월절을 지켰다.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을 나올 때도 어린양의 피가 필요했지만 그들의 옛사람은 죽지 않았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어린양의 피가 적용되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넘어졌고, 심지어는 이민족(바벨론)의 지배를 받게 되는 운명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언약을 주신다. 이 새언약은 신약에서의 언약과 같은 것이다. 바벨론에서 받은 새언약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세상이라는 애굽에 머물고 있는가? 광야에 있는가? 가나안에 있는가?가나안에서 넘어졌는가? 베벨론에서 다시 새언약을 받고 귀향하고 있는가? 교회로 인도받았지만 옛사람이 아직 죽지 않았는가? 거듭났지만 육체 속의 또 다른 자(혼)에게 싸워 넘어졌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언약을 생각하며, 다시 일어서서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갈 것인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갈림길에 서게 된다. 이기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길 외에는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며, 승리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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