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로마서 5장 5-11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그의 인생에서 어떤 혜택을 누리게 되는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먼저, 새로운 신분증을 발급받게 된다. 그의 신분증에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기록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 된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게 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세번째, 환난 중에서 즐거움을 찾아낸다. 왜냐하면 환난 중에 인내하게 되고, 인내하면 단련되어 더욱 성숙하게 되며, 결국 천국을 향한 소망이 더욱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그 때에 보게 될 소망은 현재 지나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난은 또한 성도를 지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때, 성령이 도우시는 것이다.『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좋은 특권이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 은혜로 사는 자가 방종에 빠지지 않도록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성도의 새로운 신분 뿐 아니라, 옛 신분(옛사람)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사도 바울은 과거 신분을 재차 밝히고 있다. 과거에 연약한 자, 즉 무능한 자였다. 또한 죄인이었다.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로 충만한 이기적인 존재들이었고, 자기 자신과 돈을 사랑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과거에 하나님의 원수였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도리어 좋아하는 우상숭배자들이었다. 눈앞에 작은 이익을 위해 경쟁을 당연시 여겼고, 거짓말과 탐욕을 정당화했다. 불평등에 무관심했고, 약자의 손해는 그들의 게으름 탓이라고 합리화했다. 기회를 얻기 위해 강자에게 아부하는 일은 손쉬운 일이었고, 비아냥대고, 험담하고, 당을 짓고, 술과 성욕의 쾌락에 빠지고, 헛된 자만심으로 인해 기회만 생기면 자랑하는 것을 즐거워했던 세속적인 사람이었다. 그랬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때문에 다시 살게 되었다.
바로 그 십자가 위로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졌고, 그분이 죽고 내가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심을 받기 전에, 내가 누구였으며, 내가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입게 되었는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항상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성도는 슬퍼하는 자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부름 받았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즐거워할 특권을 막을 존재는 없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님,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부어주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나날이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사도바울이 말한 것처럼, 『날마다 죽노라』를 기억해야만 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3절 에서 사도바울이 질문을 한다.『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사도바울의 서신이 일곱 개인데,『성령세례를 받으라』라는 말이 없다. 다 물세례가 무엇인지를 설명을 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축복과 성령충만에 빠져있다. 그리고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물세례를 설명하고 있다. 물세례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것 만이 구원의 시작이다.
우리의 옛사람이 무덤에서 장사되는 것이 세례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남은 단번에 즉시 영원히 얻는 구원이다. 예수님과 연합된 자는『이미 내가 죽은 자이구나』라고 인정하는 사람 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다. 새생명 즉 생명의 새로움을 얻는 것은 하늘로 부터 내려오는 생명이다. 요한1서 3장 9절에서『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성경에서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하지,『믿음의 세례』라고 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이『노아의 당시 내가 살았더라면 내가 예수 믿기로 했으니까 나는 노아의 말을 따르고 믿을 자가 될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세례를 받는다. 세례를 받으면서『내가 방주에 들어갈 자』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건 세례가 아니다. 세례는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어 장사되는 것이다. 우리는 방주에 못들어 가고 물 속에 수장된 사람들이다. 세례를 받을 때 물에 들어가는 의미가 바로 이런 뜻이다. 이것이 회개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육적 죽음을 말하고 있는데, 육은 이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것일까? 나의 정체성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가? 육은 세상을 바라보는 나다. 사도바울은 바로 옛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에베소서 4장 22절에서『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버리고』라고 했다. 사도요한도 요한1서 2장 15절에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육을 이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육을 이기기 위해 육적인 자아가 죽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노력으로 끝내려 한다. 이것이 인간의 방법이다. 그래서 세상을 버리지 못한다. 자기가 대략을 정하는 것이다. 내가 정한 방법대로 신앙 생활한다. 그래서 내가 정한 선은 넘어가지 않으려고 한다. 누가 주인인가? 내가 바로 신이고 우상이다. 이것은 어두움이다. 여기서 나의 정체성을 발견해야만 한다. 이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정체성을 깨닫고 회개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된 자아의 죽음 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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