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로마서 6장 4-7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할례는 그림자요, 실체는 골로새서에서 세례라고 말한다. 바울은 세례를『씻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례는 예수 앞에서 죄의 고백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장사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구약의 할례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할례는 씨의 약속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육체를 베어버리는 뜻이다. 육체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그래서 할례가 세례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의 피를 칠하고 출애굽(세상을 나온다)했다. 하나님의 진노를 지나간다. 그리고 광야를 지나서 요단강을 여호수아와 함께 건너간다. 홍해를 건널 때(세상을 나올 때)는 모세(율법의 상징)와 함께 나왔다.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는 여호수아(히브리어, 헬라어는 예수)와 함께 요단강을 건넌다. 그 요단강에서 할례를 행했다. 할례는 애굽을 나올 때 행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할례는 가나안에 들어갈 때 행한 것이다. 구원을 받는 세례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세례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죄를 씻는 것을 의미하지만 가나안에 들어가는 세례는 옛사람이 죽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의 대부분 교회에서는 어린양의 피를 칠한 후 애굽을 나와,  홍해바다를 건넌 후 광야에서는 어린양의 피만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광야에서는『회개하라』는 회개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구원은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구원의 결과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죄사함은 세례를 받았으므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어서 장사지낸바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다. 그 약속은『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죄인의 손에 의해서 그의 아들 예수를 죽게 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사람과 환경을 통해서 주님이 하시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열심을 내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례는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영어로 be baptized(수동태)로 표현한다. 그것이 거듭남(be converted)이다. 그러나 회개는 명령(repent)이다. 
마술장이 시몬은 마술사였다. 

구약성경으로 말하자면 마술은 죄다. 마술장이 시몬은 사마리아 성에서 빌립집사의 복음을 듣고, 믿고 세례를 받았다. 마술장이 시몬의 믿음을 거짓된 믿음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세례를 받고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녔다. 그런데 시몬은 안수와 성령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천번째 문장에서 베드로가 시몬에게『너는 이 도와 관계없다 기업이 없다』고 말했다. 베드로는 시몬이 세례받은 자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믿고 세례받아도 자기부인의 회개가 없다면 구원받지 못한다. 

베드로가『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다』라고 그 이유를 말해준다. 주님의 영이 믿는다고 하는 자에게 보여주셔야만 알 수 있다. 그런데 베드로는 구원의 길을 알려주었다.『회개하라 그리고 주께 기도하라, 주께서 혹시 너의 악함을 용서해 주시리라』고 말했다. 악독이 가득한 자도 회개할 수 있다. 그런데『전적으로 타락한 자가 회개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자들이 있다.『성령님이 도와주셔야지 할 수 있지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이 많은 교회에 가득 퍼져있음을 발견한다. 마귀의 거짓에 속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잊어버린 것이 있다면『회개하라』다. 모든 인간은 전적 타락한 존재다. 그러나 양심이 살아있다면 기회가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고 말한 뜻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
인자의 나타나는 때도 롯의 때와 같다고 말했다. 예수님의 재림 때는 롯의 때와 같다는 말이다. 구약에서 롯이 소돔성을 나오는 날, 소돔성은 음란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롯의 가족은 그 타락을 이겨내고, 천사가 그들을 그 성으로부터 끄집어내었다. 그리고『뒤를 돌아보지 말고 머물지 말고 계속가라』고 말했다. 

구원은 단순하지만 쉽지 않은 것이다. 구원은 좁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고,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쉽지 않다고 표현한다.『협착하다』는 헬라어의 단어가『어렵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자기를 부인하는, 회개하는 자만 그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넓고 좋게 느껴지는 길을 택한다. 회개하는 자와 회개하지 않는 자는 서로 물과 기름처럼 대화가 통할 수 없다. 옛사람과 새사람처럼 서로 다른 존재기 된 것이다. 

마귀는 자기부인의 회개를 말하지 않고,『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90%는 주님의 것인데, 인간인지라, 육신인지라 10%는 안되라고 말하면서도, 믿으므로 구원의 확신을 말한다면 거짓에 속는 것이다. 100%가 주님의 것이 되지 않으면 새사람이 되지 못한다. 요한1서 3장 9절에서『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자기를 부인하는 회개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이 어디에 속해 있는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옛사람인가 거듭난 새사람인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장사되었는가, 아닌가? 

이것을 증명한 것이 롯의 처의 이야기다. 거듭나지 않은 자, 옛사람은 롯의 처라는 말이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가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자는 롯의 처다. 롯의 처는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기둥이 되었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세상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는 롯의 처가 된다. 요한1서 2장 15-16절에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롯의 처에게는『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끝까지 버리지 않는다』가 왜 적용되지 않는가? 소돔성에서는 천사가 롯의 처를 끄집어 내었는데, 끝까지 적용되지 않는가? 세상을 사랑하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한 거듭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다 롯의 처처럼 뒤돌아보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얽매여 있는 자는 다 뒤돌아본다.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만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는 예수와 함께 못박히고, 예수와 함께 다시 일으키심을 믿는 자들이다. 

예수와 함께 못박힌 것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로마서 7장 4절에는『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라고 하고 있다.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다. 로마서 6장 7절은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에서 벗어남을 말하고 있다. 세상에 대하여도 죽은 것이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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