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로마서 4장 1-3절)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신앙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이 죄인이며, 죄인인 자신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자각이 있을 때 구원자를 찾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의 근거를 아브라함에서 찾아 설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의인이 되었는데, 그의 행위로 된 것이라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이 드러난다.
아브라함은 계속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 말씀에 적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을 부인했을 때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드려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어떤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이를 믿음으로 여기신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믿음은 자기부인의 결과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그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한 것임을 설명한 후, 바울은 다윗의 시로서 결론 맺고 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 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다윗은 죄악에 오염된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밝히 드러났으며, 회개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사해주시고, 의롭게 여기셨다. 모든 인간들은 이와 같이 죄악에 갇힌 인간들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돌이키는 회개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99세 때이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은총을 받을 때는 75세 때다. 24년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다. 그러나 백세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받아드려지게 된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자기의 생각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백세에 이루어진 믿음이 된다.
4장 19절에서는『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한 것이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다. 이 말씀은 하박국에서도 언급된다. 하박국 1장에는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안된다. 자기는 성실하게 사는데, 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나만 죄책감으로 싸이고 다른 사람들은 잘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2장에서는 하나님이 하박국에게『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말씀하신다.
『산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이 믿음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이다. 죄를 짓게 하는 악으로 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의인이 되는 길이다. 내가 악인인가를 알게되는 것은 바로 죄를 통해서 깨닫게 된다.
로마서 1장 28-32절에서는 죄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된다.『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이 모든 일이 사형에 해당한다. 그래서 사형수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로마서 1장 18절에서는『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이 전한 복음이 바로 이런 이야기다.『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회개치 않는 자는 찍혀 불에 던져우리라』말했다. 노아가 전한 것도『사람의 생각하는 바가 악해서 회개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노아가 전한 것이 의의 도』라고 말씀하셨다.
죄에 대한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율법이 없이는 죄를 깨달을 수 없다. 로마서 2장 5절에서『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회개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진노를 쌓고 있다는 말씀이다. 죄는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는 것과 해야할 것을 하지 않은 것도 포함된다. 로마서 3장 10절은『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시편을 인용한 말씀이다. 3장 18절에서 이유는『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은 죄를 짓고, 죄를 짓게 하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성령을 구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으면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로마서 3장 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3장 19절에서는『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에게만 적용된다. 회개는 죄를 짓게 하는 자아를 부인하는 자다. 그래서『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다. 노아와 가족 7명은 방주로 들어갔다. 방주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되는 것이다. 방주가 십자가다. 40주야 비가 오는데도 죽지 않도록 하는 방주, 하나님의 사랑을 방주 안에서만 알게된다. 십자가의 죽음에 연합하는 자만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 방주 밖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만 있을 뿐이다.
로마서 4장 23-25절에서『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여기서『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의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이다.
그리스도 밖에서 믿는 자는 이 믿음에 속하지 않는다. 회개의 의미도 모르면서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단순히 영접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회개가 바로 십자가로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가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십자가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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