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로마서 3장 27-31절)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안디옥 교회와 유사하게 자생적으로 세워진 로마교회는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에 세워졌던 여타 초대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섞여 있었다. 유대교 전통 신앙을 배경으로 한 유대인 성도들과 헬라 문화권의 종교적 배경을 지닌 이방인 성도들 간에는 분명 문화, 종교적 차이로 인해 관점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바울은 1장 16절에서『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구원의 보편성을 선포한 후, 1장 18절- 2장 16절에서 이방인 성도들의 죄를 지적했고, 2장 18-3장 8절에서 종교적 특권으로 율법과 할례를 내세운 유대인 성도들의 죄를 지적한 다음, 이 둘 모두를 종합해서 3장 9-18절에서 온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일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3장 19-20절에서 그는 율법을 소유했다고 해서, 또 율법의 행위(선행)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고 단호하게 밝혔다. 그리고 3장 21-22절에서『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라고 말화면서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했다. 

바울은 다시 한 번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 관계를 의식하여 율법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통한 개인적 의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유대인 성도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함께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동일한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그리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은 모두 동일한 방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지금까지 율법을 희생시키고 믿음을 강조해왔던, 즉 율법과 믿음이 서로 대립관계인 것처럼 주장해왔던 바울의 논조가 갑자기 변한다. 믿음과 율법의 관계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그동안 인간이 율법에 제시된 제사를 지내고 계명을 철저히 실행하는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앞서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속량을 통해 모든 것이 성취되었기에 더 이상 율법을 통한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이므로 율법을 완성한 것으로 하난임이 인정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모습으로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유 만으로 그렇게 된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율법에 얽매이고자 하는 것이다. 날마다 죄를 회개해야만 죄를 사하심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단번에 희생제사를 드렸건만, 오늘날 죄인들은 날마다 제사를 지내는 것 같은 죄에 대한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제사를 지낼 필요는 없어졌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는가의 여부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는 믿음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율법과 전혀 상관없는 자가 된다. 율법을 안지켜도 되는가? 율법과 상관없으므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든가 안해도 된다든가 하는 말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비록 육체가 있지만 그 육의 몸(옛사람)은 이미 예수와 함께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비록 육체가 이 세상에 살지만 영의 몸으로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본디오 빌라도와 대화할 때, 요한복음 18장 36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죄인이 율법이 없었을 때는 죄를 알지 못했는데, 율법이 들어오므로서 죄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깨닫게 해주므로 율법은 거룩한 것이다. 율법은 죄인에게 대해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기 때문에 그것이 거울이 되어 죄를 판별해낸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많은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죄를 짓는지 않짓는지 살펴보고 율법대로 잘 지켜서 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율법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계속 드러나는 것이다. 인간들이 율법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게 자기 중심적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게 해주셨는데, 율법을 통해서 의를 이루어보겠다고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통해서 죄인은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든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3-24절의 말씀이 바로 그렇다.『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옛언약이며, 복음은 새언약이다. 죄인이 율법을 벗어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들어갔는데도, 다시 옛언약인 율법에 사로 잡혀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영적 간음인 것이다. 영적 간음은 우상숭배와 같다.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잡신에게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자를 개와 돼지로 표현했다. 마태복음 7장 6절『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개라고 표현할 때, 개의 습성을 나타낸다. 잠언 26장 11절에서『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이 말은 율법에서 자유함을 주었는데, 다시 율법에 얽매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는데,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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