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로마서 9장 13-14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는 방법이다. 『기록된 바』는 말라기 1장 2-3절의 글이다. 말라기는 구약성경에서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선지자다. 그런데 말라기 4장 5-6절에서『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이 말은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말하기를『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인데, 왜 이런 말을 하시는가?』라고 묻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런 질문을 말을 할 수 있겠으나, 각 시대마다 볼 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지는 않으셨다. 이게 하나님의 의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회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런데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회개를 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회개할 수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례요한이『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말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이 죽자 같은 말씀을 하셨다. 사도바울도 로마에서 죽기 전에 아그립바 왕에게『하나님이 회개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말한다. 

회개는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인간은 회개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회개할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된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죄가 해결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은 회개에 대한 정확한 말씀없이, 너무 쉽게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그런데 이 말은 회개하여 택함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방법이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차이는 회개라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의로 다가가신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이 사랑으로 다가가시는 것이다. 열처녀의 비유에서 열처녀 모두가 주님을 신랑으로 여겼다. 그러나 슬기로운 다섯처녀만 혼인잔치에 들어갔다. 

9장 13절에서 이삭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기를 가졌는데, 리브가의 뱃속에서 쌍둥이가 싸우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기를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싸울 때『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라고 하셨다. 인간의 죄성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아기 때부터 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 싸움은 정욕이라고 말한다. 태어나기 전부터 뱃속에서 유전되어 나오는 것이다. 싸움에서 이겨 먼저 나오는 자가 나중에 나오는 자를 섬기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자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에서『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하나님이 택하시는 기준은 자격이 없는 자를 부르신다. 자격이 없는 자가 회개하는 자가 된다. 어느 시대나 야곱과 에서와 같은 모습이 있다. 야곱은 장자권이 없었지만, 에서는 장자권이 있음에도 팥죽 한 그릇을 장자권보다 더 중히 여겼다. 자기의 힘으로 먼저 나온 에서가 이렇게 장자권을 경히 여긴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셨다. 성경에서『에서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기회를 달라고 해도 주지 않으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강팍하게 하는 자를 강팍하게 하신다. 회개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시편에서 말한다. 이 말씀은 노아의 때를 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물로 심판하신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으나, 회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 반응해야만 하지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반응하지 못하고 명령이 불응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동산으로부터 나가게 했다. 하나님이 명령(아말렉왕을 죽이라)을 어긴 사울왕에게『네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를 버린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게 하나님의 공의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방주 안에 있는 자, 새언약에 참여하는 자만 사랑하신다.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 회개라는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가는 의미는 자기라는 자유의지를 내려놓는 일이다. 노아가 외치는『의의 도』를 들은 자는 가족 중에 7명이었다. 복음의 시작은『의의 도』이지『사랑의 도』가 아니다. 방주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 7명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지만, 노아가 외치는 말을 깨닫고 회개하여 방주에 들어간 자들이다. 성경에서 말하는바 노아를 제외한 어린아이들로 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생각하고 계획하는 바가 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서 선포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만 알고 회개하는 것이다. 비가 오자 방주의 문이 닫히고, 어른에서 갓난 아이까지 다 죽었다.『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말한다면 이해가 되는가?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의로우신 결과이시다. 주님은 노아와 연관된 친인척이라고 봐주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를 방주에 들어가게 허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과 사탄을 따르는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지옥을 만드셨다. 지옥은 불에 타지만 죽지 않는 곳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를 깨닫지 못하고, 사랑 만을 말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보다 사랑을 먼저 말하는 자가 된다.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로마서 9장에서『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회개하지 않는 자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는 주인인 셈이다. 자유의지를 갖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회개의 말을 싫어한다. 자유의지를 갖는 자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 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이 옥문이 열려 나가게 해주셨다. 그래서 지키던 간수가 죽임을 당했다. 그 간수는 고문을 하지 않았지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심한 고문을 당했다. 마찬가지로 옥문이 열려 나갈 수 있게 하셨지만, 그 간수는 자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이 그를 말려, 오히려 구원받게 했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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