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로마서 9장 27-33절)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자신의 동족이 실패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애끓는 고통을 토로하지만 이러한 바울의 동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은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는다. 동족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히려 로마서의 전반부에서 논증했던 혈통적 유대주의의 해체에 대한 논의를 다시 이어갔다. 앞의 6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혈육인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스라엘에게 복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졌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 아니며, 나아가서 이스라엘에게서 난 이들이 모두 이스라엘이 아님을 이내 말한다. 즉 동일한 아브라함의 혈통이지만 그 속에는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가 있으며,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후자에게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약속의 자녀는 혈통적 계보를 따라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 인간의 원함이나 달음질,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해 사람들은 반문할 수 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허물하실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럴 수 없다』라고 단호히 말한다. 바울이 하나님의 정의를 변호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긍휼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다루시는 근거는 정의가 아니라 긍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멸망 받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다면 그것은 그분이 불의하신 증거가 아니라 긍휼과 사랑의 증거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고 어떤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로 놀라운 것은 바로 도무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사람들에게서 종종 오해를 받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전적으로 그분의 자비와 긍휼에 기초한다. 또한 이러한 오해는 로마서 3장에서 논증한 것처럼 우리 모두는 선과 악의 중간지대에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에 대한 인식을 결여한 것에서부터 오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멸망받아야 할 죄인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라는 것이다. 

혈통적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혈통과 그로부터 파생된 것들을 특권으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였기 때문에 그 특권의 벽을 허무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대해 아우성치며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비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의로우시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에 대해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실 지라도 죄인들이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멸망치 않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딤정2:4/벧후3:9). 

일반적으로『회개하라』는 말을『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뉘우치고 고백하고 용서를 빌라』라는 말로 이해를 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은 일을 했거나, 다른 사람에게 좋지않은 일을 했을 때, 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남들이 보기에 손가락질 받을 만한 일을 하게되면 교회에 와서 그 행위에 대해서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회개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회개하라』의 의미를『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뉘우치고 고백하고 용서를 빌라』라는 말로 이해를 한다면 성경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하면서『자신은 율법을 잘 지켰다』고 말했다. 그래서『죄가 없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율법을 잘 지켰으므로『죄가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이『죄인을 부르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라고 말을 했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와 상관없는 일로 생각했던 것이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에서 예수님께서『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왜 우리가 자유케 된다고 하십니까』라고 되물었다. 예수님이『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율법을 가지고 잘 지켰으므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다 죄인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가 있다고 생각하면, 율법에 따라서 제사를 드릴 때『죄가 다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회개할 것이 없는데, 예수님은『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많은 교회사람들은 세상에 살면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면『죄를 회개한다』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많은 오늘날 교회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가 크게『다르지 않다』라고 생각들을 한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표상이요, 모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곧 세상 사람들의 죄요,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죄다. 죄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라는 의미이다.

하나님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모든 것은『스스로 선악을 판단한다고 말해도 악한 것이라』는 말이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하나님 안에서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 없이 스스로 율법에 비추어서 선을 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율법에 따라서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은 율법의 기준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지켜서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기준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지만 그것을 판단하고 행하는 것은『인간이 스스로 한다』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결국『율법을 지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 있다』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회개하라』라고 외친다면 무엇을『회개하라』는 것인가? 스스로『선악을 판단해 보겠다』라고 뱀의 유혹을 받아서 과실을 먹고, 하나님을 떠났는데,『회개하라』는 말은 하나님께로『돌아오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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