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장 12-13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구원이 쉽게 느껴진다. 바울이 세례받을 때 들은 이야기다. 사도행전 22장 16절에서 바울의 간증이 나온다.『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다메섹에서『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이 믿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라는 것을 믿는 것으로 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 때 빛으로 눈이 멀었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주님의 빛이 비춰져도 영적 눈이 멀게된다. 회개하는 자가 그 빛으로 눈이 뜨여진다. 

삼일동안 바울은『내가 주를 대적했구나』라고 회개를 한 것이다. 사십년 광야생활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기록되었는데, 광야에서의 죄들은 성막을 만들자마자 아론의 아들들이 다른 불을 드리다가 즉사하고 만다. 광야에서 간음하다가 몇천명이 죽었다는 것이 간단하게 나오고, 상세하게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죽었다는 내용이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보다 높게 되려고 하는 죄들을 기록한 것이다. 

바울이 삼일 동안 영이 깨어난 것이다. 삼일만에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왔다. 삼일의 기간은 바울이 회개하는 기간이었다. 치유한 다음에 말한 내용이다.『네가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라고 했다. 베드로는『네가 회개하여 각각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라고 말했는데,『회개하라』는 말 대신에 『주의 이름을 불러』라고 했다. 이 말은 요엘서를 인용한 말이다. 회개는 예수가 주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에서『주여 뉘시니이까』라고 말했다. 그 때 사도바울의 주는 만군의 여호와다. 삼일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 자신인 것도 깨달았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에서『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여기에서『주여 주여』 라 말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내 이름으로 예언할 때 너는 나를 모르고 있었잖아, 그래서 나도 너를 몰랐다』라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권능을 행했지만, 예수를 모른다는 말이다. 교회에서『아멘』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예수를 알고 있는가? 예수가 주가 되지 않으면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를 주라고 말한다면 삶에서 예수가 주가 되어야 한다. 

사도행전 19장 13-15절에서『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여기서도『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했다. 이 말은 예수가 주인이지 않으면서, 그냥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말하는 것이다. 예수가 주가 되어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가족 중 누군가가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가족도 아니면서 아버지라고 부르면 어떻게 되겠는가?『너 누구니?』라고 말할 것이다. 회개는 예수가 주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연합되지 않으면 예수가 주가 되지 않는다. 십자가로 들어오지 않으면서, 주 예수라고 불러도 예수님은 『너 누구니?』라는 것이다. 

회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로 들어가는 과정을 말한다. 세상에서 짓는 죄를 반성한다고 할 때 그 반성도 회개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본 의미는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을 회개라고 한다.『자아』라는 악의 속성에서 돌이키는 것이 회개라는 것이다. 악은 그대로 두고 죄의 결과만 반성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악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 
악이 죽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만 구원받는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를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성령의 능력이 임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이 임해도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사무엘상에서 사울왕에게 비록 성령이 임했지만, 사무엘이 제사를 드리지 말고 기다리라고 한 그 말을 순종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버리고 전쟁에서 패한 것을 본다. 주님의 주되심을 거역한다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7절에서『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이런 사람은 회개한 적도 없고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리 예배드리고,『주여 주여』라고 말해도 육신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을 앞서게 되면 옛사람인 것이다. 구원은 옛사람을 수선하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죽는 자가 누구인가 옛사람이다. 옛사람은 인간 속에 있는 악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악이 저질러 놓은 죄는 예수와 함께 악이 죽을 때, 하나님이 씻어주시는 것이다. 악은 하나님께 원수가 된다. 그래서 악이 저질러놓은 죄에 대하여 죽어야만 한다. 

우리 육신 속에 있는 것은 로마서 1-3장에서 그 죄악성을 열거하고 있다. 육신 속에 악이 그대로 있다면 매일 죄를 반성하고 회개해도 거짓 회개에 불과하다. 예수를 매일 십자가에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에 불과 할 것이다. 죄 이전에 먼저 악이 죽어야만 한다. 악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상처럼 자리잡고 있다. 이 악이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자기 탐욕의 우상이다. 회개하기 전에는 다 육신적인 사람이라는 말이다. 회개하기 전에는 하나님께 다 원수가 된다. 이게 열정탐꾼의 이야기와 같다. 홍해바다를 건너는 기적을 체험했다. 매일 맛나를 먹고, 성소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이게 구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열정탐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다. 이게 다 육적인 사람인 것이다. 

가나안은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가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는 거듭난 자 외에는 영접할 수 없다. 거듭난 자가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육신적인 것은 하나님께 원수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받아드릴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육신적인 것을 십자가에 못박아야만 그리스도를 받아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자기부인의 회개없이, 초신자에게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거짓 복음이다. 오늘날 사영리는 어떤 수준에 있는가를 보면 알 것이다. 육신적인 것은 수선이 불가능하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된다.

 매주 교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회개하는 모습은 옛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을 수선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계속 고치려고 한다. 마치 죄만 고백하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죄를 고백하고 계속 죄를 짓는다. 인간은 어차피 죄를 짓는 존재라는 것을 당연히 여기면서 죄의식도 없게 된다. 이게 회개하지 않은 모습이다. 회개는 죄의 문제가 아니라 내재되어 있는 악의 처리 문제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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