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로마서 11장 25-36절)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떠나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탕진한 둘째아들이 죽은 자같이 되어 돌아오자, 아버지는 아들을 품에 안으며 잔치를 열었다. 아버지 곁에서 한결같이 살아왔던 큰 아들 입장에서 보자면, 아버지의 이러한 처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큰 아들은 『노하여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눅15:28) 아버지에게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15:29,30). 큰 아들의 견지에서 아버지의 처사는 불공평 그 자체였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삼켜버린 아들을 복권시키고 잔치를 여는 아버지의 처사 앞에, 수년을 수고하고 애쓴 큰 아들은 아버지를 등지고 섰다.
이른 아침에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을 데려왔다(마20:1).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여 품꾼을 데려온 주인은, 이후에도 오전 9시와 12시, 오후 3시에 나가 품꾼을 데려왔다. 뿐만아니라 하루가 저물어가는 오후 5시에도 일자리가 없는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다. 그런 후 주인이 품삯을 주는데, 단 1시간만 일한 품꾼이나 이른 아침부터 종일 수고한 품꾼이나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 씩을 지급했다. 이른 아침부터 많은 땀과 수고를 한 품꾼들의 견지에서 주인의 처사는 불공평 그 자체였다. 1시간만 일한 무능한 품꾼들에게 동등한 품삯을 준 주인의 처사 앞에 이른 아침부터 수고한 품꾼들은 주인을 등지고 섰다.
둘째아들을 환대하는 아버지의 처사도, 1시간 일한 품꾼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포도원 주인의 처사도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처사로 아버지의 곁을 지켜온 큰 아들은 아버지와 멀어지는 것 같고, 많은 땀을 흘린 품꾼들 또한 주인과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은혜를 입은 이들을 향한 아버지와 주인의 은총이 클수록, 큰 아들과 먼저온 품꾼들의 마음은 아버지와 주인에게서 멀어져 간다. 두 비유에서 큰 아들과 이른 아침에 부름받은 종들의 이야기는 로마서 11장에 비추어본다면 여기서 끝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이었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처사에 등을 지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끝이 아니라고 한다. 바울은 현실의 이면에 담긴 온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며 말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선물이나 선택의 은총을 그들의 우둔함이나 불순종으로 인해 거두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의 우둔함과 불순종을 통해 구원을 이방인에게 이르게하시며, 마침내는 큰 아들이며 이른 아침부터 수고한 품꾼 같은 유대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우둔함과 불순종에도 구원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바울은 신비라고 했다.
사도바울이『이스라엘은 눈이 감겨지고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누가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두고『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에 빛을 비추어 주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은 누가는『이방인의 때』라고 했다.『이방인이 다 구원 받을 역사가 일어날 때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방인의 때가 차면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사도바울이『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 이방인의 수와 누가가 말한『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에서 이방인의 때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씨의 약속을 하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에 대한 씨의 약속은 천하만민을 위한 씨의 약속이다.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도 이방에 대한 씨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 그리고 이사야서 49장 6절에도 이스라엘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방에 대한 구원이요, 구원의 빛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찾도록 했지만 실패하고, 이제는 이방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이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구원은『영이 구원받는 것』이며, 육체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육체를 가진 생명체는 죽어야 하는데, 단지 육체가 죽을 때 까지 구원이 예정된 것(인치심)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육체가 죽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나 육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육체 속에서 나타난 마음이 악한 것이다. 그래서『죽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악한 마음이 예수님과 십자가 위에서 함께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 하나님을 떠난 천하만민에게 믿는 자들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이 말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사야서 61장 1-2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여호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어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신원의 날을 전파한다고 했다. 은혜의 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간을 말한다. 신원의 날은 마지막 때, 이스라엘의 회복 때, 즉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일어날 마지막 환란을 말한다.
누가복음 4장 18-19절에도 은혜의 해에 대해서 누가가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나사렛 지방의 한 회당에 가셔서 이사야서를 읽고『오늘날 이 글이 응했다』고 하신 말씀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할 때는『은혜의 해와 신원의 날』을 말했지만 누가는 신원의 날을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도록 예수님 승천 이후에 약 2000여년의 기간을 주셨고,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니엘이 말하는 바 69 이레와 70 이레의 시작점 사이에는 상당한 기간이 연결되지 않은채 시간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방인의 전도는 하나님에게는 중요한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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