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장 3-8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로마서 1-11장이 복음의 내용을 설명했다면 12장에서 15장은 복음으로 의롭게 된 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즉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실천적 부분을 다루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야만 한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 안에 갇혀있는 자다. 그런데, 믿음이 온 자에게도 이 믿음을 전하는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이다. 이 모든 것이 믿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되는 것이다. 하늘로 부터 오는 믿음을 전하지 않고 이런 일들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의 의를 세우는 것 밖에 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을 전하는 일은 마치 몸의 조직과 기관처럼, 맡은 바 역할이 있듯이 이런 조직과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협력해서 몸을 이루듯이 그렇게 됨을 바울은 설명한다.『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했다. 『마땅히 생각해야 할 부분』은 바로 믿음을 전하는 일이라고 말을 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 외에 그 이상을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사용된 여러 수단들(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이 본질을 잊은채 주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오늘날 국내외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해외 선교를 한다고 멀리 타국을 갔는데, 하늘로부터 오는 믿음에 대해서는 전하지 않고, 구제나 섬기는 일 등에만 집중한다면 곤란한 것이다. 

성도가 전해야만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전하는 일이다. 인간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으며,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아들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지, 그리고 다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를 각자의 맡은바 믿음의 분량대로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에서 은사를 사람마다 다르게 받은 능력이나 재능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기능적인 것이 아니라, 맡은 바 역할을 의미하는 것이다.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하므로 사람들은 믿음에 있어서 양적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도들 마다 생각하는 믿음에 대해서 양적 차이가 아니라 반응적 차이로 생각할 수 있다.

 셋째 하늘에 끌려 올라가 본 사도바울이 반응하는 믿음과 세례를 받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일반 성도의 믿음이 다를 수 있는가?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의 반응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마치 양적 차이가 있는 것처럼 여기겠끔 번역한 것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 『분량』이라는 말은 영어성경에서 the measure로, 측정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믿음에 있어서 능력의 차이가 없다. 거듭나지 않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아니다. 성숙되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믿음은 여전히 거듭나지 못한 자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표현에서 믿음으로 칭의를 얻었지만 어린아이 같은 믿음의 상태라고 라고 말을 한다면 거듭남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는 믿음을 의미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못한 믿음은 거듭난 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거듭난 자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어, 다시 태어나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단순히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죽은 자라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인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6-27절『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이 말씀을 근거로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에게 구원을 설명하는 것은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거듭난 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받는 식은 안된다.『예수를 영접하면 예수가 내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듭난 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예수님께 영광돌리는 장차 미래의 죽음을 생각하지 말고, 오늘 지금 영광을 돌리는 삶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의 거듭남이 필요하다. 그래서 영적 구원이 있는 열매 맺는 삶이 되어야만 한다. 예배가 열매는 아니다. 사도바울은『이방인이 회개하여 주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산 제물로 드린다』고 했다. 제자가 되는 삶이 있어야만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어떤 모양이든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은『미지근하면 토하여 내치리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했다.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예수님이 주인인 자이고, 예수님으로 부터 구속된 자다. 그렇게 되어야 그리스도가 그의 구속된 자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구속이 없는 영접은 없다. 구속이 없는 믿음은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 해당한다.『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이게 아브람이 75세에서부터 99세에 이르기까지의 상태다. 율법에 갇힌 상태를 말한다.『육체를 따라 난 자를 이스마엘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구원받지 못하는 신앙이다. 이삭 만이 성령으로 난 자라고 말한다. 

『믿음이 오기 전에』에서 말하는 믿음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의 믿음이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고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니고데모는 이 말씀에 답이 없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니고데모는 하나님을 믿는 랍비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고 찾아온 자다. 요한복음 3장 2절에서『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이렇게 말한 니고데모였지만 예수님의 하신『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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