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14장 13-23절)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기독교인들만큼 사랑과 은혜라는 단어를 많이 말하는 사람들은 없다.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에 그렇다. 세상에 수많은 종교들 중에 단연 기독교만큼 사랑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종교가 없고, 예수님만큼 사랑을 분명하게 가르쳐준 분이 없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거듭났고, 그 사랑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그 사랑을 목적으로 삼고 그 사랑을 힘입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는 도리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분열이 일어날 때가 많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 분열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성경말씀이라는 잣대로 타인의 의견을 판단하고 비교하며, 정죄하고 배제하면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써내려가면서 14장에 이르러 사랑이란 이렇게 시작하고 해결하는 것임을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연약한 자의 의견을 업신여기지 않아야 하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믿음이 강해 자유로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생각의 차이를 판단하고 배제하지 않고 존중해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사도 바울은 강변하고 있는데, 좀더 구체적인 지침을 오늘 본문에서 부연설명하고 있다.『그런즉 우리는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서로 사랑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먼저 부딪칠 것과 거칠 것을 제거하라 한다. 먼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업이 본질적인 것이고, 음식문제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그 고백 위에 예배를 드리며, 그 진리를 다시 전파하여 날로 구원받는 사람들이 늘어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되는 공동체, 그것이 하나님의 사업이다. 이 구원에 관한 진리와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결코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관습이나 의식의 문제 같은 부차적인 것들이라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차적인 것이 본질을 흐리게 한다면 곤란하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차라리『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라고 말했다. 서로 덕을 세우도록 하라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사랑이란 믿음의 본질 하에서, 원수를 사랑하고, 용납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서로 신자간의 의견과 관습과 의식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상호 배제하지 않고 존중해주는 자세를 가리킨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 문제가 하나님의 사업, 즉 본질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단지 관습에 불과한 음식과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인지 구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둘의 구분은 실상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양측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는 없다. 먼저 믿음이 강한 자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안된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믿음이 강한 자들이 먼저 양보하고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비본질적인 것들에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우상에게 드려진 제사상 위에 올랐던 고기라 할지라도, 그 고기 자체가 불결한 것이 아니기에 먹어도 전혀 양심에 가책이 없음을 그는 알고 있는 자유인이었다. 그러나 신념이 부족하고 아직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자유롭게 행동하고 말하는 자신을 보고 실족하게 된다면, 그는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더욱 중요한 것, 바로 하나님의 사업 때문이다. 서로 질서를 세우고 화평을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고,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은 비본질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신비가 있고 지혜가 있고 답이 있다. 우리가 성령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사업인 본질과 비본질을 분별하는 지혜가 생긴다. 우리가 성령님 안에 거하면 믿음의 강함과 약함을 떠나 서로 업신여김과 정죄를 그치는 포용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성령님 안에 거하면 그 의와 평강과 희락이 서로의 차이를 넘어 상호 존중하게 하고 공존하게 한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경우 교회에서 비본질을 규정화하여 율법적으로 신도를 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규정을 잘 지켜 행하면 믿음이 강하고, 그렇지 못하면 믿음이 약한 이분법적인 사고를 주입시키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신앙의 본질은 성도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사탄으로부터 잡혀있는 인질들을 구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사탄의 자식이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다. 사탄의 자식이 되므로 스스로 자기의 의를 쌓고 자기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심지어 우상을 만들고, 온갖 잡신을 세워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인 영을 죽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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