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로마서 8장 33-39절)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 교회와 바울 모두 확신 위에서만 살 수 있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까지 세워졌지만 제국의 중심지에서 과연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는지 고민했던 로마 교회에게 확신의 문제는 중요했다. 바울은 과거에 바른 길을 가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는 죄책감을 지금 맡겨진 사역의 동력인 채무감으로 바꾸기 위해 은혜의 확신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과 기도를 여러 번 되새김질해야 했을 것이다.
바울은 확신에 대해서 설명한다. 본문에서 『누가』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 교회는 누군가 대적했고, 고발했으며, 정죄했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 했다. 이것은 외부적 환경의 이야기일수도, 내면에서 날마다 우리를 절망케 하는 속삭임일수도 있다. 바울은 이러한 현실이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에 멈춰있지 않고 현실 너머의 부르심을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바울은 현실의 문제에 대한 답변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을 이정표와 종착지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셨다는 것은, 우리 또한 그렇게 내어줌 당할 수 있고, 기꺼이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임을』(갈 2:20)
이를 위해 살아가는 자가 의지할 것은 오직 항상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그리스도 예수뿐이다. 히브리서 7장 25절에서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바울이 로마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는 머릿속 망상이 아닌 삶의 이력이었다. 나아가 그가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기록한 칼이라는 단어를 통해, 로마로 나아가는 목적은 안정된 직장에서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고백하며 순교의 제물로 드려지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기며 살아갔다. 바울은 죄책감을 이기는 확신의 문제를 적당히 덮고 피해가려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자격이나 능력이 아닌, 우리를 사랑하는 분 때문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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