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로마서 9장 1-6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위해서라며 자기가 저주를 받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괜찮다고 할 정도로까지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자신을 핍박하는 유대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토록 가슴 절절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바울 자신도 이전에는 자기를 핍박하고 있는 유대인들과 똑같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무자격자이자 무가치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처럼 무자격자, 무가치한 사람에게 먼저 찾아와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자로서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기에, 지금 자신을 핍박하는 동족 유대인들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눈으로 바라보며 사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라고 말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육신적 혈통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택함을 받고 부르신 참된 영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사라의 여종인 하갈에게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이스마엘이 아닌 약속의 말씀으로 태어난 이삭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 이스라엘은 바로 이방인에서 택함을 받을 것이다.
사도바울이『이스라엘은 눈이 감겨지고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누가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두고『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방에 빛을 비추어 주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은 누가는『이방인의 때』라고 했다.『이방인이 다 구원 받을 역사가 일어날 때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도 예루살렘은 이슬람교도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방인의 때가 차면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사도바울이『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 이방인의 수와 누가가 말한『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에서 이방인의 때는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씨의 약속을 하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에 대한 씨의 약속은 천하만민을 위한 씨의 약속이다. 이사야서 42장 1절에서도 이방에 대한 씨의 약속의 말씀이 있다. 그리고 이사야서 49장 6절에도 이스라엘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방에 대한 구원이요, 구원의 빛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찾도록 했지만 실패하고, 이제는 이방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이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구원은『영이 구원받는 것』이며, 육체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육체를 가진 생명체는 죽어야 하는데, 단지 육체가 죽을 때 까지 구원이 예정된 것(인치심)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육체가 죽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나 육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육체 속에서 나타난 마음이 악한 것이다. 그래서『죽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악한 마음이 예수님과 십자가 위에서 함께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 하나님을 떠난 천하만민에게 믿는 자들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이 말을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다. 이는 율법에 갇혀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7장 15-21절에서『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의 뜻은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되어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7장 23절에서『나는 너를 모른다』 라고 하신다. 마지막 때의 비유에서 마태복음 24장 32-33절에서『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이 때의 무화과 나무는 마지막 때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워진 것을 깨달아라는 것이다.
그 상황이 누가복음 17장에서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다는 말씀이다. 둘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노아의 때는 창세기 6장 2-3절에서『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아들과 딸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하늘과 땅, 씨가 있는 자와 없는 자, 그런데 둘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둘 다 아들과 딸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는 사람의 딸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같은 교회에 앉아 있으면서도 하나는 성령의 법을 따르는 자, 하나는 율법에 갇혀 있는 자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출생이 다른 것이다. 하나는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사람의 딸)이고,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거듭난 생명(하늘의 아들)이다. 그런데 둘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아들은 씨의 약속을 가진 자, 딸은 씨의 약속을 가지지 않은 자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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