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로마서 9장 7-12절)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바울은 이삭과 리브가를 통해서 태어난 쌍둥이 에서와 야곱에 대해서 말한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라고 말씀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그 어머니가 달랐다. 그러나 에서와 야곱은 동일한 어머니에게서 그것도 쌍둥이로 태어난 자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서 대신 야곱을 택하셨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에 대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신 것은 야곱의 그 어떤 행위에도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시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긍휼 가운데 이루어진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라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부르심을 입은 자는 많되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에서 왕이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초청장을 보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왕이 화가 나서 그들의 동네를 불사르고 진멸한 후에 신하를 시켜서 아무나 데려오라는 것이다.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누구든지 오게했다는 예화를 든 것이다. 첫번째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고, 두번째는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자를 말한다. 그런데 두번째 예에서 왕이 예복을 입지 않은 자의 손과 발을 결박하여 어두운 곳에 던져버렸다. 이와 같이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하심을 입은 자는 적다는 것이다.
로마서 9장 7-13절에서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육신을 따라 난 이스마엘과 성령을 따라 난 이삭을 말하고 있다.『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이게 거듭남을 말한다. 이삭의 부인 리브가의 이야기를 살펴보면『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리브가는 자식(야곱과 에서)이 태어나기 전에『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는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리브가의 뱃속에서 서로 다투고 있었다고 말한다. 에서가 먼저 태어나 큰 자가 되고, 야곱이 다음에 태어났다. 태어난 순서는 행위대로 태어났다. 육신의 법칙이다. 강한 자가 먼저이고, 약한 자는 나중이다. 택하심은 육의 씨가 아니라 약속의 씨를 근거로 말씀하신다.
회개하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게 된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회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었다. 로마서 9장 31-33절에서『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회개하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가 부딪히는 걸림돌과 거친 바위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믿기로 했으니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다. 자기부인의 회개없이는 다 약속의 씨를 받을 수 없다. 약속의 씨에 대한 믿음이 오기 위해서는 자기부인의 회개가 반드시 있어야만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게된다. 그렇지 않으면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 처럼 율법에 매여있는 자가 된다. 약속의 씨에 대한 믿음은 로마서 6장 4절에서 처럼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어야, 하나님이 약속의 씨를 부어서 신령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베드로는 수많은 기적의 경험과 체험을 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던 유대인들도 십자가에서 예수를 다 버렸다. 십자가에서 선 예수는 그들에게 부딪히는 돌, 거친 바위가 되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의 반석이라고 말하지만, 자기부인의 회개없이는 넘어지는 거친 바위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리 교회 생활을 오래하고, 열심히 신앙생활 할지라도 자기부인의 회개가 없다면, 예수는 십자가 앞에서 그들에게 거친 바위에 불과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4-5절에서『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성령체험을 해도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성령이 내주하는 역사가 있어야 거듭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회개는 죄악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죄를 사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누가 죽는가? 바로 악함의 탐심, 악함의 원죄, 부모로부터 받은 육이 예수와 함께 장사되는 것 만이 거듭남이요,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는다. 하늘로부터 태어난 다른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 이 존재는 죄와 상관없는 신령한 몸을 가진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존재다. 요한1서 2장 9절에서『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부모로부터 받은 육신 속에서 마음의 변화를 거듭남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부활의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로 부터 받은 육신에 집중하면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는 원죄로 인하여 전적 타락한 존재다. 육체의 악함이 아니라 육체 속에 원죄라는 악함으로 오염된 육체라는 것이다. 이 육체는 죄를 씻는다고 깨끗게 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자기부인의 회개를 통해서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방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방주가 바로 그리스도 안이다. 방주가 어느 시점에서는 닫힐 것이다. 그 시점은 바로 눈 앞에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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