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장 1-9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텃밭에 농작물을 심는다.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고 흙으로 덮을 때면 씨앗의 여린 싹이 두터운 흙을 뚫고 올라올 수 있을까 염려가 된다. 농부는 씨앗을 심기는 하지만 씨앗으로 하여금 싹을 틔워 땅을 뚫고 올라오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씨앗은 땅을 뚫고 싹을 내어놓는다. 인간의 눈으로 모두 볼 수는 없지만 땅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땅위로 솟은 어린 싹이 과연 잘 자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경험이 많은 농부라면 만물이 어린싹이 자라도록 돕고 있음을 안다.
저 높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때로는 얼마나 굵은지 모른다. 가속도까지 붙어 땅에 이르면 어린 싹이며 잎을 상하게 할 법도 한데 비는 싹을 해하지 않고 뿌리와 잎에 새 힘을 더한다. 저 멀리서 비춰오는 태양은 세상을 밝힐 뿐만 아니라 어린 싹의 몸통과 줄기를 자라게 한다. 아침과 밤의 리듬 속에서 농작물은 생기를 얻기도 하고 쉼을 누리기도 하면서 조금씩 자라난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농작물의 성장을 지켜본 농부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다.
농부가 스스로 농작물을 한뼘이라도 자라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농부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는 만물이 그의 뜻을 따라 순환하고 운행하며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작은 텃밭을 가꾸는 농부일지라도,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은총을 누릴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작은 생명으로 하여금 움트고 자라고 결실하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알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바울파와 아볼로파로 나뉘어 시기와 분쟁을 일삼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텃밭의 비유를 든다.『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들이 아직 육신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와 같아, 아직 육신에 속해 있는 그들은 사람을 따라 행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바울과 아볼로는 확실하고도 선명한 존재다. 보이지 않아 가늠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따르는 일은 막연하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을 따르는 일은 안정감을 준다. 보이지 않는 진리를 믿는 것보다 보이는 현상을 따르는 것이 쉽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보다 보이는 우상을 섬기는 일이 쉽다. 실로 육신에 속한 인간의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생활이라는 현실의 막연함과 불안함 속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말았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일은 눈과 귀와 생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인간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또한 가나안에 들어가면 약속을 주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지만 백성들은 믿지 않았다. 열두 정탐꾼은 지파의 대표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가장 믿음이 좋고 믿을만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은『젖과 꿀이 흐르는 심히 아름다운 땅이다』라고 말했지만, 열명은『거민을 삼키는 땅이고 그 곳에는 아낙자손(거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거의 육십만명이 열명의 정탐꾼의 말을 믿고 통곡하고 밤새도록 울었다. 이게 옛사람이다. 우리가 그 당시 살았더라면 여호수아와 갈렙을 따랐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율법에 사로잡힌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열정탐꾼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옛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복음이 된다. 옛사람은 육적인 생각이다. 육적인 생각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나의 정체성이 육을 따르는가 성령을 따르는가? 그 기준은 옛사람이 죽었는가 아닌가의 차이다. 성화되어서 육의 마음을 이기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육신의 생각을 바로 잡고 고쳐서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만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반성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육신의 생각이다. 육신의 생각이 죽는 것이 회개다. 인간적으로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한가? 이렇게 수 없는 사람들이 말을 하지만, 2000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진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옛사람이 죽을 때 그 다음에는 성령님이 모든 것을 이끌어주신다. 로마서 8장 9절에서『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옛사람이 죽은 자는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게 된다. 로마서 8장 4절에서『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의 핵심은 죄 용서가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육적 옛사람이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이다. 양자가 된 사람(새사람)은 법적으로 이전의 아비와는 관계가 단절된다. 이전의 아비(옛사람:마귀의 자식)를 부정해야만 한다. 옛사람은 사망의 법이 적용되지만, 새사람은 성령의 법이 적용된다. 내 속에는 두 마음의 법이 죽을 때까지 싸운다. 『나』라는 정체성은 어느 법을 따를 것인가?
옛사람은 반드시 죽어야만 살 수 있다. 옛사람이 죽는 것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이게 회개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성령의 법을 따르게 된다. 로마서 6장 17-18절에서『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2장 9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예비하신 모든 것은 인간의 눈과 귀와 마음의 생각으로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믿음은 인간의 이해와 경험의 지경을 너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헤아리는데 이르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 하나님께서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근원이심을 알게될 때에, 눈에 보이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진실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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