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고린도전서 6장 9-11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사도 바울은 개척 교회로부터 답답하고 한심한 이야기들을 전해 들었다. 교인끼리 너는 무슨 파, 너는 무슨 파하며 갈라졌다는 소식부터, 의붓어머니를 근친상간 했다는 이야기까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뿐 아니라 성도끼리 일상의 작은 일 때문에 벌어진 다툼을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해 세상 법정에까지 가지고 가서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다. 사도 바울은 아비의 마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가르치겠다고 하며 편지를 써 내려갔는데, 이 부분에서는 마치 호통을 치는 듯했다. 아예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공개적으로 부끄럽게 하겠다며 야단을 친다.

사도 바울을 이토록 분노하게 한 이유는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해도 쉬쉬하면서 넘어가거나 온정주의에 사로잡혀 문제를 바로잡지 못해 결국 일을 더 크게 키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더 분노하게 만든 것은 다른 것이었다. 당시 로마 식민지배 하에서의 형사소송은 대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민사소송만큼은 그렇지 못했다.

 판사나 배심원들은 모종의 대가를 기대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고, 사회적 경제적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은 이 민사소송을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하고, 사람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곤 했다. 부유한 자들이 하위층에 속한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그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조종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불의한 제도가 횡행하는 사회에서 믿는 신자들이 그 제도에 기대어 소송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유하고 우월한 지위에 있는 성도가 자기의 이득을 위해 가난하고 낮은 계급에 있는 동료 형제 그리스도인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사도 바울은 교회는 달라야 한다고 믿었는데, 교회가 세상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한다는 것에 매우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성도들 중에 적지 않은 자들이 예전엔 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의 탐욕을 좇아 타인을 이용하고 조종하고 경쟁하며 살았지만, 이젠 성령님의 씻음으로 인해 거룩한 성도가 되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과 다른 것이다. 설령 다툼이 생긴다 해도 세상 법정에 가서 이기느니, 차라리 손해 보는 것이 더 복음에 합당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기꺼이 복음을 위해, 자기의 권리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들이 곧 그리스도인이다.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하면서 미혹당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고린도교회 교인들 중에는 이런 음행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이전의 것은 죽고, 성령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자들이라는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육체가 있으므로 그렇다치다라도, 성령 안에서 거듭났다고 말하면서 이런 음행을 하는 것은 유익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곧 죽은 자인가 죽지 않은 자인가의 차이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7장 21-23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육으로는 이렇게 연약하여 넘어질 수 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임을 고백하고 다시 일어서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바 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난다. 

로마서 6장 2절『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요한1서 3장 8절에서『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라고 했다. 요한복음 8장 11절에서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에게『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하시니라』에베소서 4장 26절에서도『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죄를 짓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계속 죄를 짓고 용서받으려고 하고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부각시키면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상황이 되었다. 그 이유는『자기』라는 존재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귀는 택하신 자도 미혹하려고 한다. 구원은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허물은 세상죄를 말하며 죄는 원죄를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어있는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는 열심히 사는데, 하나님께 대하여 반응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 6장 2절의『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로마서 2장 1절의 말씀과 로마서 6장 2절의 말씀 사이가 바로 회개다. 하나님에 대해서 죽은 인간이 회개하여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어야만 구원을 받는다.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를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말씀하신다.『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에게는 살아계신 주님은 오시지 않으신다. 오직 회개하고 예수와 함께 죽은 자에게만 주님이 성령을 보내시어 함께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게 영접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의미도 모른채, 영접 기도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에베소서 2장 3절에서『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에서『전에도』라는 말은『회개하지 않고, 예수와 함께 죽지도 않은』이라는 말이다.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사는 자들은 결국 세상을 사랑하는 자다. 그래서『모든 사람이 진노의 자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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