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린도전서 10장 1-13절)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
히브리 백성이 애굽을 나와서 가나안을 들어가려면 홍해바다와 요단강을 건너야했다. 이 두번의 건넘은 당시 상황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있는 교회였지만, 1장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멸망하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인다고 했다. 오늘날도 성령을 추구하지만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생각한다면 구원의 핵심을 비켜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은 증거다. 오늘날 십자가의 길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회개하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이는 것이다.
로마서 6장에서 말하는 세례는 이 세례와 다르다. 로마서 6장의 세례는 예수와 함께 죽은 세례다. 6장 3절에서『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그러나 홍해바다에서는 바로왕의 군대가 대신 죽었다. 이사야서에서『애굽을 내가 너희의 대속물로 주었느니라』라고 했다. 주님은 애굽을 이스라엘의 대속물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모세에게 속하여서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광야에 나와서 매일 하늘에서 내려온 신령한 음식 맛나를 먹었다. 그게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광야에서는 구원의 기회다. 유월절까지 주님은 죄를 넘어가시고 간과하셨다. 애굽에서 지은 죄를 묻지도 않고 기억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모든 죄를 다루셨다. 안식일에 나무하러 가는 것 부터 길이 험하다고 원망하는 것 등 말과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이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들이 물을 달라고 하면 주님이 반석을 쳐서 음료를 주셨다.『반석은 그들을 따르는 그리스도』라고 바울은 말했다.
그들은 광야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영적인 물을 마셨다. 이것은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0장 5절에서『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라고 했다. 히브리서 4장 1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구원의 기준은 애굽을 나온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다. 히브리인들은 복음 전함을 받은 자들이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칠하여 장자의 죽음을 보지 않고 애굽으로부터 나왔던 자들이다. 그러나 단지 그 믿음 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오늘날도 예수의 피로 죄 사하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그 믿음 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이 외적인 순종을 했지만 그것이 구원의 전부는 아니였다. 옛사람이 광야에서 죽어야만 했다. 내적으로 믿음이 화합되지 않으면 외적으로 온갖 믿음의 모양을 다 갖추어도 죽은 믿음인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요단강으로 건너갈 때 이것을 두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한다.
구약성경은 신약의 그림자다. 구원의 확신은 요단강을 건넘에 있다. 요단강을 건너는 여호수아에게『담대하라』라고 했다. 왜냐하면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와 싸우는가? 마귀는 먼저 내 생각 속으로 들어가 『자기』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영을 질식시켜 버렸다. 죽은 영을 살리는 것이 어린양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회개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마귀를 쫒아내는 일이다.『자기』가 마귀의 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가신다. 이것이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이유다.
마태복음 10장 32-33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여기에서『부인』하는 단어는『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그 단어다. 온갖 기적을 체험하고 신령한 말씀을 들은 베드로였지만 세번 예수님을 부인했다. 삼년 동안 열두 제자와 다녔지만 예수님은『돌이킨 후에 너희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다.
아무리 기적을 경험하고 신령한 말씀을 들어도 회개는 별개의 것이다. 회개는『자기 부인』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구원을 여러 의미로 말하고 있어서 애매하기도 하다. 병 낫는 것도 구원,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도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구원이라는 말을 폭넓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영의 구원이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번이나 따랐지만 안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삼년간 같이 다닌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부인한다는 말이다.
내 육체와 혼을 이루는『자기』를 위해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 다 십자가의 예수를 부인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했기 때문에 십자가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라는 혼적인 존재는 베드로처럼 십자가의 예수를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자기를 채우기 위하여 교회에 나온다면, 회개하고 자기를 버리기 위해 교회에 나와야만 한다. 예를 들어 만일 오늘 죽는 것을 안다면, 모든 것이 허무하고 다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 십자가에서 죽는 자가 되지 않는다면 바울과 같은 고백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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