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전서 1장 1-9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기간 중 약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세운 교회였다. 당시 고린도는 로마의 속주 중에서 아가야라는 로마 행정구역의 수도였으며, 그 지역 총독의 거주지였다. 바울시대에 고린도는 아테네보다 더 큰 로마 제국의 네 번째 큰 도시로 사실상 그리스의 중심지였는데, 당시에도 인구가 약 60만 명을 헤아리는 상업중심의 거대 도시였다. 거대한 상업도시들이 그러하듯이 고린도 역시 다양한 외부 문화에 개방적이었으며, 그것은 곧 도덕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그러하였기에 고린도는 성적으로도 매우 문란한 심각한 도덕적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고린도서를 기록할 당시 바울은 3차전도 여행을 이미 시작하여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할 즈음에 있었다. 거기서 바울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전해 듣고 있었는데, 그것은 고린도교회에 여러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고린도교회는 지식이 풍족하며 영적인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상황들에 대처할 수 있도록  바울은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편지의 서두에서 바울은 자신을『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로 소개한다. 당시 고린도 교회 내에는 여러 분파들이 있어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먼저 자신의 사도권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사람이란 의미다. 바울은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 죽이는 앞장섰으며, 공공연하게 교회를 핍박했던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뒤 극적인 회심을 체험하고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자신의 사도됨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사도로 부름 받았음은 물론 역시 사도의 자격으로 편지한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이 편지를 통해 전하는 주님의 말씀의 신실성을 의심하거나 훼손치 말고 그 교훈을 분명하게 지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편지의 수신자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밝히며 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음을 말한다. 고린도라는 지명과 나란히 하나님의 교회라는 명칭이 언급된 것은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우상숭배와 환락의 대명사인 고린도와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은 성결한 사람들의 모임인 하나님의 교회란 표현을 이어 사용함으로 타락한 세속 도시에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극복하고 또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기도 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바울의 감사가 기록되어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윤리적이고 영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참 담대한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이미 많은 문제로 인해 갈라져서 다투고 있었고, 윤리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회가 위치한 고린도라는 도시조차 당시에도 이미 타락과 부패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도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미쁘심때문이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바울은 타락의 도시에서 타락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던 고린도 교인들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미쁘시다』라는 말은 『신실하다, 믿을만하다』라는 뜻이다. 바울찬양과 선언은 고린도 교회의 상태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담대히 선언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을 성도로 불러 세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헬라의 사교장이라 불리었을 만큼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기에 막대한 부와 사치를 누렸던 곳. 더욱이 아프로디테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우상의 신전이 즐비하였고, 성적인 타락과 방탕이 가득했던 곳.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이러한 곳에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가운데에도 과거에 이와 같은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한 두 명이 아니었을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시거나 업신여기지 않으시고 불러내셨다. 그것은 그들이 구원받을 만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만백성이 구원을 얻고 이방에 빛이 비취리라고 말씀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함이셨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에베소서 2장 5-8절에서『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는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인간들의 노력과 헌신이 있기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달려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있다. 인간의 의 따위는 하나님께는 티끌보다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이게 하나님의 주권이시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와 죄인의 회개는 연결되어 있다. 회개는 하나님 은혜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래서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하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 사람들은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예수를 영접하는 자는 구원의 은혜를 받는다』는 식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보고, 죽으라고 말하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구한다. 출애굽 히브리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이 보낸 불뱀에 물리게 되었다. 하나님이 불뱀을 보낸 이유는 깨닫고 회개하도록 보낸 것이 아니라, 물려 죽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하고 있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높이 달게 하셨고, 바라보는 자마다 살게 하셨다. 그 놋뱀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뱀의 독이 퍼져, 뱀과 같은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하며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