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의 방언과 예언(2)


(고린도전서 14장 20-33절)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린도 교회가 여러 일로 시끌시끌했다. 교회 안의 파벌 문제(1장), 근친상간 사건(5장), 소송 사건(6장), 우상 제물 문제(8장), 성만찬 갈등(11장)으로 요란하더니, 14장은 성령의 은사로 인해 소란했다(12-14장). 내가 더 좋은 은사를 가졌느니, 내가 더 큰 은사를 가졌느니 왁자지껄했다. 특히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소란을 떨었다. 방언이 가장 신령한 은사인양 공중 예배 중에도 과시하고, 대표기도 조차도 방언으로 기도하곤 했다. 그러한 무질서한 방언 남용이 예배의 정신을 흐렸다. 이에 대해 바울의 권면은 명쾌했다. 

본문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방언과 예언의 차이점. 둘째, 방언과 관련된 문제들. 셋째, 방언과 바울의 개인적 적용. 넷째, 방언과 예언의 목적이다. 
첫째, 방언과 예언의 차이점에 대해 사도 바울이 방언을 하는 고린도 교인들이 저 혼자 잘 믿는 것 같이 남의 신앙은 깔보고 혼자 둥둥 떠있는 사람들에게 예언과 방언을 비교하여 그들이 그렇게도 높게 평가하고 있는 방언은 예언보다 교회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더 못하다는 견해를 밝히므로 방언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을 낮추어 성도로서의 바른 자세로 환원되도록 시도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방언 은사 제일주의에 빠져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의 허점을 지적해주고 있다. 그리고 신령한 은사를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도록 하라고 하여 방언과 예언을 대조하여 예언이 방언보다는 더 소중함을 암시하여 신비주의에 빠져있는 방언파를 구제하려는 시도를 보게 된다.

방언의 종류를 크게 두 종류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는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기나라 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 지방 말 즉 다른 나랏말인 방언과 다른 하나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말하고 있는 세상 나랏말이 아니므로 사람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나님만이 들으시는 영적인 말인 방언으로 구별될 수 있다.

예언의 은사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잘 풀어 가르치는 말씀의 은사를 말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많은 은사 중에서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비교했다.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예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사람은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방언이란 그 방언을 듣는 사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은 듣는 사람에게 잘못을 고치게도 하고 격려도 되며 말씀을 통해 큰 유익이 되게 한다고 했다. 또 방언이란 방언을 말하는 자신만의 유익을 위한 것이나 예언은 예언을 듣는 교회의 유익을 준다고 했다. 
사도 바울은 온 교인들이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한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방언보다는 예언하기를 바란다고 했으며, 교회에서 통역이 없다면 방언이란 예언만 못하다고 단정하고 있다.

둘째, 사도 바울은 방언의 문제점을 제시하여 줌으로 예언이 방언보다 더 낫다는 결론을 주고자 했다.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 교회에서 개척하고 전도를 할 때에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예언의 은사를 사용치 않고 방언만 했다면 고린도 교회에 무슨 유익이 있었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분별할 수 없는 악기에 비유하기도 했으며 분명치 않는 나팔 소리나 뜻이 없는 소리,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에 비유하고 있다. 악기마다 자신의 소리를 구별하는 소리를 내야하고 나팔도 무슨 목적으로 부는 지 분명한 소리를 내 주어야 하며 남에게 말을 한다면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해야 함 같이 교회에서 방언을 하려 한다면 교회에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하여 통역이 함께 주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바울은 방언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고자 자기의 신앙 경험을 소개하고 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 자신도 방언에 대해서는 고린도 교인 누구보다 더 깊은 체험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이와 같이 방언의 체험을 가진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기의 영만이 기도하고 자기의 마음과는 전연 상관이 없다고 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마음과 전연 상관이 없는 방언 기도가 예배라는 개념에서는 반쪽 기도임을 전제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위한 기도와 찬송은 영과 함께 마음으로 기도하며 찬미하겠다고 고백을 하게 된다. 영과 마음으로 하는 기도와 찬송은 내 마음이 생각하고 이해한 것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넷째, 예언과 방언의 목적에 대해,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신을 자랑하고 남을 무시하는 그런 악에는 어린아이들과 같이 천진하기를 바라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교회에 유익을 주는 일에는 어른들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제하고 방언과 예언의 목적을 분명히 가르쳐 주면서, 방언의 교만에서 회복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예언은 믿는 자가 듣고 깨닫도록 주어진 것이나 방언이란 불신자들이 오순절에 일어난 이적적인 방언의 역사를 통해 회개하도록 믿지 않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믿는 자들이 모이는 교회에서는 방언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교회에서 방언을 한다면 혹 불신자들이 와서 보고 그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모두들 미쳤다고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을 하면 그 교훈과 책망을 이해할 것이기 때문에 듣고 뉘우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에 도취되어 자신이 무척 신령하다고 믿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예언과 방언을 비교하면서 아주 쉽게 올바른 깨우침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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