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고린도후서 1장 12-14절)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고린도는 동서양 무역의 요충지, 아가야의 수도였다. 다양한 문화의 교차점으로 유행, 우상의 도시였다. 복음은 그곳을 강타했다. 복음 안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길을 발견했고, 새롭게 살도록 초청받았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과거 삶의 방식과 작별하지 못하였다. 추악한 음행과 당파싸움, 심지어 종교적 문제인 은사 분쟁 등으로 교회는 몸살을 앓았다. 특히, 바울의 사도권을 향한 심각한 도전이 일었다. 심지어 바울이 고린도 방문계획을 변경하고 번복하자, 진실성 문제가 대두된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보아야 할 것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외모나 행동, 언행이 거슬려서 하나님을 놓쳤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과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을 전했다.『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바울은 고린도전후서를 통해, 복음을 알려주고 복음과 관계 맺는 법을 알려주고자 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희미하게 보이는 고대 청동거울처럼,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희미하다. 그렇기에 성도는 복음 안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인다. 고린도교인은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었다. 고린도교인들은 복음 안에 비본질적인 것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불완전함과 미성숙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품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복음의 손을 내밀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바울은 손을 내밀어, 고린도교인들을 자신과 같은 단단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길 원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믿음을 주관하려 들지 않았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나님을 독대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세번째 편지를 보내는 내용이다. 아시아에서 당한 내용을 반드시 기억하라는 것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문제의 해결보다, 이 일이 왜 나에게 일어났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 일이『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는 것이다. 바울도 죽을 때까지 죄성을 고민했었다. 거듭났지만 그 속에 악(죄성)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뚜렸하게 알지만, 그 죄성이 바울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그 죄성은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부터 벗어나 내 스스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죄는 악의 결과이지만, 그 죄성이라는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옛사람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자기를 의지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 땅에서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 이 일이 왜 발생했는가를 알아야만 한다.『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그렇지 않으면 모두 사탄이 말한 것처럼『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아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은 옛창조의 하나님이 아니라 새창조의 하나님이시다. 새창조의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 명령에 대해서『왜 우리에게 이 명령을 주셨지?』라고 생각하면 옛뱀에 넘어가게 된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왜 이것을 명령하신 것이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신뢰의 관계다. 그래서 먼저가 순종이다. 순종하지 않고 왜를 생각하는 것이 미혹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많은 사람들은 하나님도 기뻐하고 나도 기뻐하는 것을 찾으려고 한다. 이게 회개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다. 나는 빼고 하나님만 기뻐하는 것을 찾아야만 한다.
그 다음에 12장 2절에서 말한다.『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하나님의 명령과 언약은 순종이 먼저이지 분별이 먼저가 아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실 때 제자들을 시험하시고자 했다. 구약시대 광야 40년 동안 백성들을 낮추시사 시험하셨다고 신명기에서 말씀하신다. 모든 시험은 우리를 낮추신다. 애굽 땅에서 바로왕의 혹독한 명령으로 백성들이 낮추어진 것은 하나님이 낮추시기 위해 하신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어려움으로 낮아진 것을 스스로 낮춘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주님이 예배가운데 낮아지게 된 때 시험하신다. 주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시험하신다.
오병이어의 기적 전에 빌립이 말하기를『이 사람들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분별이다. 주님이 시험하시는 것은 분별이 아니라, 순종하는 자를 찾으신다. 사울왕을 폐하신 이유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많은 교회에서 물질적 해결과 축복을 받으려는 기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백 데나리온이 문제가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를 찾으신다. 어리섞게 보이는 안드레가『여기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가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오천명을 먹여야 하는데 애가 가지고 있는 작은 음식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안드레와 같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광야에서는 갈렙과 같은 사람이다. 갈렙은 가나안 땅에서 아낙자손을 스스로 이길 힘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갈렙이 붙잡은 것은 주님의 약속과 명령이었다. 하와를 넘어뜨린 옛뱀이 질문하는 것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주신 명령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 명령 속에 숨어있는 약속을 찾으라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 명령을 잊지 않는 것이 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율법이 은혜를 막는 것처럼 사탄이 주입해 놓았다. 은혜와 율법은 다 같은 것이다. 율법이 그림자이고 은혜가 실체가 되는 것이다. 은혜는 율법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을 내가 스스로 이루려고 하는데 문제가 생긴다. 율법을 이루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가 율법을 이루어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율법을『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예수 안으로 들어간 자』에게 이루어주신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순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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