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린도후서 4장 8-18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는 것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죽음 뒤에 들어날 예수의 생명이 직분 맡은 질그릇 같은 성도들에게 나타나게 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것은 부활의 승리 때문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할 때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마지막 권면을 했다.『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은혜로 말미암아 직분을 받은 자들은, 질그릇에 보배를 담고 살아가는 이들은 겉사람은 계속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기 때문이며, 직분맡은 이들은 잠시 받는 환난에 떨지 않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바라기 때문이고, 직분 맡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하는 것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들이 아닌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이『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한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짖지만 그리스도가 주가 되었는가는 다른 차원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사람들의 죄를 대속했기 때문으로 받아들인다. 십자가에서 모든 공로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분이 주가 되는 것은 회개한 자에게만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인간이 뭔가 덧붙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선행과 어떤 노력과 같은 행위를 덧붙일 수 없다. 그러나 그 예수가 주가 될 때에는 열매로서 믿음의 행동이 나온다. 믿음에 덧붙이는 행동이 아니라 주 예수로 인해서 나오는 행동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체험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주가 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예수님이『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가는 것이 아니요』라고 하셨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있게『그리스도가 나의 주라』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뭔가 꺼려지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좀더 현실적으로 이야기 하자면『그리스도 예수가 나의 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항상 성령의 생각과 육신의 생각 사이 기로에 서 있다. 인간은 생각을 하게되고, 생각이 끊임없이 솟아오른다. 어떤 경험적 기억을 통해서 아니면 문득 누군가가 주입해서 생각이 솟아오르지만 사탄이 주입할 때는 하와처럼 성령의 생각에 서 있지 못하면 넘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을 분별하지 못하면 다 넘어지고 만다. 생각은 반드시 그 원천이 있기 마련이다. 혼의 생각들은 끊임없이 솟아오르지만,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각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원천으로 생각이 떠 오를 때 주님은 그 생각 속에서 역사하신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가 반드시 주가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성령이 임재하는 곳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육체가 될 뿐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빛과 어두움처럼 명확히 드러난다.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생각을 나눌 때 주님은 지혜를 주시지만 사탄이 주는 생각에 몰입할 때 사탄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 와도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생각인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인지를 판단해야만 한다. 그러나 사탄이 주는 질문에 답하려고 하면 하와처럼 된다. 그래서 민감하게 반응해야만 한다.
우리가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주 되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베드로는 삼년 동안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다. 베드로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렇지만『주』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회개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다. 회개는 정체성이 바뀌는 작업이다. 내가 스스로의 주인에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바뀌는 것이다. 베드로는 온갖 기적을 경험하고 놀라운 광경을 체험했지만 그리스도가 주가 되지는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다.
회개하기 전에는 그리스도 예수가 주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삼년 만에 말씀하셨다.『오늘밤 너희들은 다 나를 버리리라』그리스도 예수가 주가 아니므로, 육신의 주인인 자기가 육신이 주는 마음에 따라 예수를 믿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죽기 얼마 전에 요한과 야고보의 모친이 예수님께 말씀했다.『당신이 왕이 될 때 우리 아들들을 좌우편에 앉혀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었지만 육신을 따라 믿었던 것이다.
예수님은『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라고 응답하셨다. 주님은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는 자를 찾으신다.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는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 오르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기를 원하나이다』이렇게 고난의 잔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예수가 주가 되지 못한다.
십자가에서 체포되기 전에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이 와서 두 아들들을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했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오늘밤 너희는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동안 그들 속에서 나오는 생각은 다 육신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육신적 생각이 가득하다면,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 무엇이 다를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에 제자들은『누가 크냐』라고 다투었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여전히 교회 안에서도『누가 크냐』로 다툴 것이다. 회개는 자기를 포기하고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드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 스스로 변하지 않는 존재다. 성령 체험을 하고, 온갖 기적을 경험해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 인간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다른 것으로 바뀐다. 이게 정체성의 변화다. 많은 교회에서는 죽지않고 끊임없이 변화받기를 원한다.『결단하고 변화하세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은 변화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 또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정체성의 변화에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자아가 죽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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