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고린도후서 5장 1-10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16절에서 비록 겉 사람은 낡아지나 그의 속이 날로 새로워지고 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외부적으로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 어려움들은 그가 장차 경험하게 될 영원한 영광의 무게와 비교해 본다면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것 이었기 때문에 지금 환난을 당하고 있더라도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광을 바라보며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을 이겨낼 수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현실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바울은 고린도후서5장을 시작하면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는 상황을 이야기 한다. 이는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땅에서 무너질 수 있는 유한한 인생을 비유한 장막 집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과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장막은 몸으로 비유된다. 육의 몸과 영의 몸이다. 하나님 나라로부터 오는 영원한 장막(처소)이 바로 영의 몸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육체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한 몸으로 영원한 나라에서 사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당하는 어렵고 힘든 상황 앞에서 그것을 인내하며 이겨낼 수 있다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다.
장막은 하나님과 만나는 언약의 장소를 의미한다. 율법 시대 이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만난 곳이 장막이었다. 하나님이 손으로 지은 집은 바로 육체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셔서 인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아담을 에덴동산에 넣어주셔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했다. 아담의 육체 속에 있는 영이 살아나서 하나님과 교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서 육체는 오염되고, 영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모든 인간들의 장막이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가 있다. 이 처소가 바로 영의 몸이다. 영의 몸을 입지 않으면 벗은 자들이 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그들이 벗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영의 몸을 입지 못하면, 벗은 자들이 된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덧입는 것을 말한다. 『덧입는다』는 말은 옷을 하나 더 입는다는 말이다. 육의 몸에 영의 몸을 입는다는 의미다. 거듭나는 사람은 두가지 옷을 입고 있는 셈이다. 육의 몸과 영의 몸이다. 육의 몸이 죽어야 생명으로 이어진다. 생명은 영의 몸이다. 로마서(6장 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죽을 것(육의 몸)이 생명(영의 몸)에 삼켜지는 것이다. 그래서 죽을 것은 사라지고, 영의 몸인 생명만 남게된다.
환난 가운데 탄식하며 있을 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나라에 대한 희망을 통해 성도가 위로를 받게 되는데 그러한 일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지고, 생명에 위협을 받을 만큼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될 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을 그냥 두시지 않기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허락해 주신다. 성령께서는 죄와 허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한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인해 그 희생과 섬김이 성도를 죽음에서 구원하여 주셔서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어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영원히 거할 집과 그 나라를 바라보게 하심으로 앞에 놓인 많은 역경을 이겨나갈 수 있게 해 주셨다.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이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어떠한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지 두 가지 모습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 이로라』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실의 많은 문제 앞에서 보이는 것에 집착하며 이기심과 물질에 목을 매는 어리석음을 범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많이 보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성령께서 우리가 바라 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손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으며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그 어려움을 당당히 이겨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모습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리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환경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때로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주님과 영원한 나라에서 안식 하며 평안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그 시간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살도록 허락하신 시간에는 최선을 다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로 힘써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기서 각각 선악간은 선은 하나님의 방법, 악은 스스로 의를 이루어보겠다는 방법이다. 그래서 그 결과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처소를 입는가 못입는가의 결과로 나뉘어진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서 설명하는 내용이 장막을 덧입는 것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되돌려받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심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자들의 세상죄를 다 용서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율법에 따라 죄를 짓는지 살펴보고 스스로 의를 지키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의로운 자들은 하나님을 떠난 것을 회개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은 자들 뿐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사람들이 새피조물을 정신적 작용으로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피조물은 이전의 육의 몸은 죽고, 영의 몸으로 거듭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육의 눈으로 생각하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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