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고린도후서 7장 1-16절)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 . . . . . . . . . . .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며 교회를 교회되게 해주는 것은 거룩함이다. 교회되게 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은 십자가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 하는 성도들이다. 성도들이 교회이며, 성도들이 모인 곳이 교회인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 간에 말씀 속에 들어가, 말씀으로 교제를 나누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죽은 자임을 기억하고 세상과 싸울 힘을 얻는 것이다. 죽은 자는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어두운 곳에서 밝은 것이 더욱 빛을 드러내는 것처럼, 어둠과 타락의 대표적인 도시인 고린도에 세워진 교회에게는 이러한 거룩함이 더욱 필요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을 권면하면서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 가운데 바울을 모함하고 비난하며 공격을 하는 사람이 생겼다. 더군다나 고린도 교회를 세운 바울을 모함하고 비난하는 내용에 대해서 고린도 교인들은 방관하며 일부는 동조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세상의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서도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바른 일을 하려고 하면 항상 중상모략과 모함이 있기 마련이다.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했지만, 바울이 떠나고 난 후 오히려 바울을 비방하고 모함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다시 방문하려고 했지만 자신을 비방하고 모함하는 사람이 고린도교회 가운데 있는 것을 알고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대신에 고린도교회를 향한 책망과 훈계의 편지를 써서 디도를 통해 보냈다. 이 편지는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바울이 쓴 또 다른 편지다. 바울은 디도를 통해서 책망의 편지를 보내고 난 후,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많은 근심을 하게 될 것 같아 마음이 아팠고 후회가 되었다. 올바른 부모가 잘못된 길로 가는 자녀들을 혼내고 난 후 마음이 아픈 것처럼, 바울은 영적인 부모로서 자녀들과 같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편지를 통해 책망을 하고 난 후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또한 그 편지를 받고 고린도 교인들이 어떻게 반응을 할지 염려와 낙심이 되었다. 왜냐하면 잘못을 바로잡는 대신에 더 반발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낙심하고 있는 바울을 위로하시기 위해서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하셨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디도를 바울에게 다시 보내심으로 바울을 위로하셨다. 두번째로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디도를 잘 영접하고 위로했다는 사실로 바울을 위로하셨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책망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애통하는 가운데 바울을 사랑하며 열심을 내고 있다는 것으로 위로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디도를 통해 바울로부터 책망의 편지를 받았지만 그 편지를 통해 회개를 하며, 디도를 잘 영접하고 위로하며 바울에게 다시 보냈던 것이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로 하여금 염려와 낙심을 하게 했지만 나중에 큰 위로를 줌으로써 바울에게 기쁨이 넘치게 하였다. 그래서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바울은 말한다. 따라서 사람들의 근심은 오직 두 가지 종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적인 근심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근심을 구별하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별이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로 하여금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말씀한다. 세상적인 근심은 우리로 하여금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위한 영적 밑거름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의 책망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게 되었고 아름다운 회개의 열매를 맺었다. 그래서 바울은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결과적으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한 사랑과 믿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알게 된 기쁨이 있었다. 바울은 믿음의 영적인 아들과도 같은 디도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진심으로 영접을 받고 위로를 받았기에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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