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복음을 쫒는 것
다른 복음을 쫒는 것
(갈라디아서 1장 1-6절)『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쫒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사도바울의 일곱 교회 서신 중에서 고린도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면서『이러한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말을 했다.『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하였다』고 말하면서『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두번이나 말을 했다.『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 할지라도 안된다』고 했다. 바울이 왜 이렇게 강력하게 말을 하게되었는가? 우리는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약 100여년 동안 현대교회에서 다른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어리섞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말했다. 계시록에는 죽임 당한 어린양을 노래한다. 그리고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에『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시작한다. 거기에 성령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아들의 복음 안에만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바로 만날 수 없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을 직접 만날 수 없었다. 야곱 조차 환도뼈가 부러진 다음에 말하기를『내가 그 분의 얼굴을 뵈었는데, 죽지 아니하였도다』그렇게 말을 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도 없지만 만나면 죽게된다. 죄인들이 그 분 앞에 서면 죽는다. 우리의 복음은 아들의 복음이라고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다. 그 아들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아들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모든 구원은 이 안에 있다.
그런데 100여년 동안 잘못된 말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성경은 완전하지 않다.
성경은 틀린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지만 원본으로 부터 틀린 것이 많다는 것이다. 성경에 뭔가 틀렸다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의 말하는 권위가 더 커진 것이다. 이것이 주류사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 다음 회개의 복음이 아니라 영접하는 복음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신하라고 한다. 우리가 믿기로 결단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약 100년간 이어져 온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예수님의 십자가는 처음 믿을 때만 의지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다음부터 구하는 것이 바로 성령세례였다. 성령님이 하시는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를 죄와 의와 세상에 대한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했다. 성령이 하시는 큰 일은 우리를 회개케 하시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은 고린도교회와 함께 은사가 되어버렸다. 은사의 문제가 기록된 곳은 고린도교회였다. 왜 고린도교회는 사도바울이 편지를 할 만큼 성령의 은사가 문제가 되었을까? 다른 교회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을까? 결국 여섯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아 성령의 은사는 중요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로 인해서 성령의 사역 자체가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시는 거듭나게 하는 영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령세례, 성령충만, 은사를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십자가의 은혜를 받으면 그 발판으로 성령을 구하므로 성화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거룩하게 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말 때문에 십자가보다는 성령에 주목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에서도 모든 종교에 자기 나름대로의 구원이 있다고 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주목해서는 안된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바울이 은사를 좋아하는 고린도교회에 말하는 것이다. 빌립보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바울이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능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 이르려하노니』라고 했다.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만이 구원인 것이다. 바울은 성령을 추구하는 고린도교회에 마지막으로 말했다.『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래서 빌립보서 3장 18절에서『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느니라』예수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원수라는 말이다. 그 이유를 19절에서 말한다.『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하나님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 이게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배라는 말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오늘날 많은 교회 안에 선포되는 수많은 말씀은 성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믿으면 잘된다는 식이다. 거짓복음이며, 다른 복음이다. 성경에는『돈을 사랑하는 자체가 악의 뿌리』라고 했다. 돈은 하나님이 주셔서 살고 있지만 그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이다. 바울이 추구한 것은『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빌립보 교회에만 말했다. 빌립보에서 여자 루디아 한명이 바울의 말씀을 따르기 시작했는데, 그 다음이 빌립보 간수였다. 처음에는 두 사람만 믿었다. 바울은 빌립보 간수로부터 고문을 당하면서도 로마시민권을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세상의 영향력을 의지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인기있는 재력가, 정치인, 연예인들을 앞세우는 오늘의 현실은 정말 다르다. 이런 현실이 거짓된 복음을 낳는다. 이럴 때 세상 사람들이 반응하게 된다. 인기인이 교회에 오면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될 것이다. 세상의 영향력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지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전혀 다르다. 빌립보교회를 통해서 사도바울은 세상의 권력에 의지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인식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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