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라디아서 3장 4-6절)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이 믿음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심을 받은 백세 때의 믿음이다. 3장 2절에서『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섞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브라함이 백세 때의 믿음으로 이것을 그에게 의롭다 함을 정하심과  같다는 말씀이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는데, 그래서 그 때 부터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다. 짐승을 쪼개게 하시고,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서 그 쪼갠 짐승 사이로 횃불이 지나가게 하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내가 너에게 후손을 주겠다. 그리고 너에게 땅을 주리라』아브람이 『이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반응하니 바로 이 횃불로 약속하신 것이다. 그리고 아브람은 멜기세덱이라고 하는 하늘의 제사장도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한다. 그런데도 이스마엘을 낳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멜기세덱을 만나는 영적 체험을 해도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 열두살이 되었을 때, 백세가 되었을 때, 육체로부터 생명이 나올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셨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99세 때 나타나셔서『아브라함아 내년에 약속한 자녀를 주리라』라고 하셨다. 속으로 웃으며 『내가 백세(사래는 구십세)나 되거늘 내가 어찌 자녀를 낳으리료, 이스마엘이나 살게하소서』라고 대답했다. 

아브람은 99세까지는 육신의 생각 밖에는 없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다. 그 해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할례를 명하셨다. 할례는 육신을 제거하고 씨의 약속을 하는 것이다. 22절에서『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이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KJV) 아브라함은 백세 때의 약속이었지만, 3장 16절에서 해석이 나온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고 하였으니 곧 이삭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게 바울의 해석이다. 

창세기를 통해 아무리 읽어도 그의 후손이라고 하면 이삭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삭이 아니라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다. 아브라함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성령으로 잉태된 자, 예수 그리스도이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 아브람도 그 때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멜기세덱을 만나도 죄 아래 가두어져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믿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죽은 것 같이 되어서 믿는 믿음이 죄로부터 빠져나오는 믿음이다. 이게 출애굽 당시의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과 같은 것이다.

열명의 정탐꾼이『들어가면 죽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뱀의 독이다. 그 혀에 거짓말이 있다. 갈렙은『약속한 땅 맞다.』그는 약속을 붙잡았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이 백세 때 약속을 붙잡았다. 99세까지는 열명의 정탐꾼과 같은 믿음이다. 이 때까지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3장까지 쓴 다음에 믿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23절에서『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믿음이 와야만 한다. 이것이 선물이다. 택하신 자의 믿음이다. 이 말씀을 로마서에서는 길게 설명했다. 6장까지는 『사람은 죄의 종이라』고 말하면서 7장 1-2절에서『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율법을 설명한다. 죄는 주인과 종의 관계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이길 수 없다. 본질 상 진노의 자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의인이라 칭해주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위해서는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죄를 이기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한다. 이기기 위해서는 사는 자는 자기를 생각하지만 죄에 대해서 죽는 자는 십자가의 예수를 생각한다. 사람들이 보기에 세상에서 선하게 살고 있다 할지라도 그 기준이 인간이 되면 다 악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되는『죄를 가진 그런 악한 인간』이다. 로마서 7장에서는 율법 아래 있음을 설명한다. 그 앞에는 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설명했지만, 1-2절 부터는 율법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설명한다. 남편이 율법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살 동안에 율법이 주관한다. 

3절에서『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율법에 대해서 자유하게 되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 뿐이다. 자신은 십자가에서 율법에 대해서 죽지도 않으면서 『성령받았다』 고 말하는 것 자체가 영적 간음이라는 말이다. 율법에 매여있으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는 자를 음녀라고 말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율법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다 율법에 매여있는 것이다. 다 죄인이다. 많은 교회 사람들은 자신이 율법에 대해서 죽지도 않으면서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령을 받는다고 말한다. 음녀들이다. 

7장 4절에서『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이게 구원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갈라디아서 3장에서『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가 된다. 믿음이 떨어진 것 같이 되면 금식기도하고 새벽기도 열심히 드리고 한다. 믿음이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그 믿음은 자기 의에 빠진 믿음이다.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장사의 과정을 놓친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물 따로 성령 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 세례는 세례요한의 죄 사함을 받는 것으로, 성령 세례는 죄 사함을 받은 후에 성령을 받는 것으로 오해한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동일하게 이루어지는 세례인 것이다. 물에 대해서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 말한다.『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장사의 과정을 모르는 자는 율법 아래 매인바 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함께 못박히지 않는 자는 여전히 죄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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