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고린도후서 10장 1-18절)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 . . . . . . . . . .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변호의 말씀이다. 고린도교회 안에 바울에 대해 바울은 비겁하고 이중적이며 육적인 정욕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사도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사도의 자격과 권위로 그렇게 말하는 자들을 담대하게 대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런 비방과 모함에도 위축되지 않고 사도됨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그런 자들을 대하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울의 삶이 이미 사도됨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이미 고린도전서 9장2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라고 말씀하며 고린도전서 4장 16절과 11장 1절에『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사도됨은 삶 자체다. 삶이 그 사람의 정체성과 실상을 입증한다.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 말의 내용, 물질의 사용 내역, 마음이 지향하는바, 인생이 목적과 방향 등등 그의 삶이 그 존재의 실상을 밝혀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는 주님과의 관계로 인해 삶의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싸움과 복종에 대해 말한다. 우리에게 싸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육신적인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복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적대자들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지만, 직접 대할 때에는, 그는 약하고, 말주변도 변변치 못하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의 적대자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눈을 어둡게 했고, 바울을 비난 했다. 그들은 외형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하고 바울이 권위적이며 그의 글과 실제가 다르다고 비난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자신으로 자신을 헤아리고 비교하며 칭찬하는 어리석은 자는 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 세상에는 말이 안통하는 싸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방식대로 싸우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싸움을 배운다.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싸움에서 지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이다. 지혜로운 삶을 사는 자는 먼저 하늘의 것을 구한다. 이 땅의 삶은 목표가 아니라 결과다. 영적인 싸움은 생각에 있다. 죄가 없는 하와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사탄이 말하는 것에 답하려는 독립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탄이 노린 것은 하나님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의 질문에 답을 해서는 안된다. 사탄의 질문을 무시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우리는 씨앗이 문제가 아니라, 밭이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새생명의 씨앗을 받는다는 약속을 알지만, 신령한 몸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약속의 말씀은 알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매일 매일 죄를 회개한다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는 못한다.『예수의 피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믿고, 예수의 피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죄를 지어도, 예수의 피가 있다는 것이다. 말이 되는가? 

예수의 피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인데, 죄를 씻는 도구로만 사용하는 것이다. 먼저 십자가의 죽음과 연합되는 것이 먼저다. 그 다음에 피가 적용되는 것이다. 죽지 않고 바라만보면 그 피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있는데, 사람의 생각과 이성이 먼저 반응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출애굽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있음을 성경은 말해준다. 어린양의 피로 출애굽하여, 세상(애굽)을 단절하였을지라도, 모든 죄를 씻는 물세례의 홍해를 건넜을지라도, 광야에 들어가 하나님으로 부터 돌판을 받았을지라도, 가나안 땅 입구에서 열 정탐꾼의 말을 믿고, 들어가면 죽는다 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다 죽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구원은 성령세례를 상징하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과 그곳에서 가나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몰아내는 싸움(옛사람의 죽음)에서 승리하는 자의 구원이 되는 것이다. 

『예수믿으면 천국간다』는 단순한 말을 의지하지만, 거듭나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의 변화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죄의 문제도 자기 생각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을 말한다. 자신이 거듭났다고 생각하면서도『사람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사탄이 주는 생각에 사로 잡혀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사람인지라 그럴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열정탐꾼처럼 육의 눈에 반응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반응해야만 살 수 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옛사람이 죽어야만 다시 신령한 몸으로 태어날 수 있다. 

예수의 피가 적용되기 전에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피값으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먼저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모든 죄를 예수의 피로 사해주실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2-4절에서『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생각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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