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고린도후서 11장 1-15절)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 . . . . . 나는 내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자랑하는 일로 우리와 같이 인정 받으려는 그 기회를 끊으려 함이라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뱀에 관한 이야기다. 뱀은 하와를 미혹하여 하나님께 범죄하게 했다. 고린도교회에도 뱀이 있었다. 뱀은 번듯한 모습으로 고린도교회에 다가갔다. 뱀은 예수와 영과 복음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뱀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뱀은 의도를 가지고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으로 미혹한다. 뱀은 예수와 영과 복음을 말하는 듯 하지만 다른 예수와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을 고린도교회에 심는다. 복음을 운운하며 교묘하게 복음을 왜곡하는 오래된 방식이다. 

그들의 수려한 말과 화려한 모습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보기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 보이기만 한다. 뱀은 자신의 말을 세우고자 바울의 언변을 비롯해 스스로를 낮춰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행동을 깍아 내린다. 자기를 낮추는 일을 굴욕적이라고 여겼던 헬라인들에게, 수려하고 자랑할 것 많은 뱀의 말은 깊이 와 닿았다. 그렇게 예수와 영과 복음이 뱀에 의해 왜곡되었고, 그리스도를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을 견지해온 교회는 부패해 간다. 교회가 미혹으로 부패해가는 순간 그들과 예수님의 관계는 일그러지고 만다. 이와같이 거짓과 속임으로 대변되는 뱀의 미혹이 심해질수록 진리는 더욱 도드라지는 법이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나누어준 삶은 거짓사도들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바울도 예수에 대해 말하고 뱀도 예수에 대해 말했지만 뱀의 저변은 미혹이었고 바울의 저변은 사랑이었다. 『어떠한 까닭이냐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사랑함으로 보여주었던 삶은 구체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삶이었다.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전하는 삶이었다. 또한 함께 있을 때 누를 끼치지 않고자 스스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삶이었다. 이와같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은 삶의 현장에서 그들을 향한 구체적인 섬김이 되었다. 헬라인들은 섬기는 삶을 업신여겼지만 바울은 이를 자랑로 여겼다. 진리가 내 속에 있는 증거로 여겼다. 사랑과 섬김의 삶 안에서만 진리가 내 속에 머물 수 있고 또한 누군가에게 흘러갈 수 있다. 

복음은 지난 100여년 동안 잘못된 말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성경은 완전하지 않다. 성경은 틀린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지만 원본으로 부터 틀린 것이 많다는 것이다. 성경에 뭔가 틀렸다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의 말하는 권위가 더 커진 것이다. 이것이 주류사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 다음 회개의 복음이 아니라 영접하는 복음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결신하라고 한다. 우리가 믿기로 결단하면 구원받는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이 약 100년간 이어져 온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예수님의 십자가는 처음 믿을 때만 의지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다음부터 구하는 것이 바로 성령세례였다. 성령님이 하시는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를 죄와 의와 세상에 대한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했다. 성령이 하시는 큰 일은 우리를 회개케 하시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은 고린도교회와 함께 은사가 되어버렸다. 은사의 문제가 기록된 곳은 고린도교회였다. 왜 고린도교회는 사도바울이 편지를 할 만큼 성령의 은사가 문제가 되었을까? 다른 교회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을까? 궁금해진다. 결국 여섯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없었던 것으로 보아 성령의 은사는 중요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로 인해서 성령의 사역 자체가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시는 거듭나게 하는 영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성령세례, 성령충만, 은사를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십자가의 은혜를 받으면 그 발판으로 성령을 구하므로 성화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거룩하게 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말 때문에 십자가보다는 성령에 주목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에서도 모든 종교에 자기 나름대로의 구원이 있다고 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주목해서는 안된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서『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해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그리스도와 율법을 이렇게 대립해 놓고 있다. 죽을 때 까지 우리가 의지해야 할 복음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뿐이다. 성령으로 옮겨가면 안된다. 그것이 미혹이다.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성령의 능력을 구한 것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은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이 전해지게 하는 능력이다. 

구원을 얻게하는 능력은 오직 십자가 외에는 없다. 십자가의 도는 길과 말씀을 나타낸다. 그러나 오늘날 교인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고 있다.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 
빌립보서 3장 18절에서『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에 원수로 행하느니라』예수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원수라는 말이다. 그 이유를 19절에서 말한다.『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하나님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 이게 십자가의 원수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배라는 말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배를 채우려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게 원수다. 우리의 인생의 목표는 땅의 배를 채우는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성공을 목표로 삼는다면 거짓 그리스도다. 인생의 목표는 성취가 아니라 변화가 되어야 한다. 회개로 시작된 것은 변화다. 이것이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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