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라디아서 6장 14-18절)『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주가 되어야만 한다. 사도바울은 삼층천에 가본 경험이 있다고 말한다. 바울이 삼층천에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을 자랑한다는 말씀이다. 대부분 교회에서는 부활을 강조한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계시록에서 천사들이 죽임당한 어린양을 노래한다. 그 분은 하나님 나라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인데, 이 땅에 와서 죽었다는 말씀이다.
갈라디아서 6장 13절에서는『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은 자는 육체를 자랑하려고 하는 자들이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애굽을 나왔을 때는 애굽이 히브리 백성을 버린게 아니라 히브리 백성들이 애굽을 버렸다. 그래서 애굽의 군대는 히브리 백성을 죽이려고 쫒아온 것이다. 홍해바다는 애굽과 단절한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광야에 나온 백성들이 애굽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매일 맛나를 먹었던 백성들이『차라리 애굽이 나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먹을 것을 가지고 불평하면서 애굽을 동경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세상이 교회 사람들에게 못박아버리는데, 그들이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자랑하려고 하는 육신이다.
육은 흙으로 이 땅에 적합하도록 지어진 것이다. 육신은 천국의 재질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재질로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땅이 좋은 것이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라』라고 성경은 말한다. 육을 아무리 수선을 하려고 해도 천국을 갈 수 없는 것이다. 구원은 세상을 따르는 육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따르는 영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위로부터 태어난 생명만 위로 올라오도록 하시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생명을 받은 거듭난 자가 아니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다. 구원의 핵심은 거듭남이다. 구원은 죄사함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전의 것은 죽어버리고, 다시 태어나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에서『새롭게』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카이노스(kainos)와 네오스(neos)라는 두개의 단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새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새술과 새부대의『새』라는 말은 단어가 다르다. 새술에서『새』는 네오스라는 단어다. 네오스가 영어의 뉴스(news)다. 뉴스는 최근의 소식이다. 새술이라는 말은 방금 짠 포도주라는 말이다. 새술은 새부대에 넣어야 한다. 옛부대는 오래 사용하던 부대다. 새부대는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부대다.
새부대의『새』라는 말은 카이노스다. 카이노스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나오는 새로운(카이노스) 피조물이다.『거듭났다』는 말은 새 포도주가 아니라, 새부대에 해당하는 말이다.『거듭났다』는 말은 영이 아니라, 몸이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포도주를 담던 옛부대가 아니라 새부대라는 것이다. 헬라어로 된『새로운』이라는 두 단어가 영어로는 new라는 단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사람(영)이라는 것이다. 살아나는 영은 새로운 몸에 들어가야만 살아난다. 광야에서 태어난 새사람은 새언약을 받는다. 광야에서 죽은 옛사람은 언약을 지키지 못하므로 옛언약이 되어버렸다. 새언약이 바로 카이노스다. 언약은 옷과 같은 것이다. 교회 사람들은 거듭났다는 말을 마음이 거듭났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개선되어 새롭게 되었다 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또는 찬송가를 부를 때,『새롭게 해 달라』는 말이 있다. 『고쳐달라, 씻어달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옛사람의 것이 죽고 새사람의 것으로 대체되면 자동적으로 씻어진 것이다. 거듭남은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구원의 핵심이 죄사함인 것으로 잘못되어 있다. 구원의 핵심은 죄사함이 아니라 거듭남이다. 옛사람이 세상에 대해서 못박혀야만 새사람으로 된다. 육체 속의 영은 스스로 살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새몸 속에 넣어주지 않으면, 새 언약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시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것이다.
옛사람의 몸으로는 영을 살릴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의 몸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새사람의 몸이 하늘로부터 등장한다.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은 카이노스다. 옛것이 죽고, 새것을 입어야만 새창조가 되는 것이다. 회개는 죄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가 거듭남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거듭남과 회개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것이다. 이전의 것이 죽고(회개), 거듭나는(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전의 것이 죽지 않으면 죄는 계속 그대로 있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의 보혈을 외쳐도 그대로 있는 것이다.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도 죄는 그대로 있는 것이다.
오직 로마서 6장 7절에서 처럼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난다. 사람들은 죄만 용서받으면 구원받는 것으로 오인한다. 회개의 의미가 죄용서받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었다. 하나님은 죄로부터 빠져 나오기를 원하신다. 죄악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길은 오직 하나,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 못박히지 않은 자는 죽은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옛사람이 죽지도 않으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회개했다고 생각하고 믿어도 하나님은『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기준을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인식할 때, 율법에 걸려 있는 자가 되고, 자기 의에 빠지는 것이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인간은 죽기 전에는 스스로 빠져 나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 만을 붙잡는다.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다. 이게 회개다. 매주 교회에서『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는데, 살지 못해서 회개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수없이 많이 듣는다. 마치 주문 외우둣이 말한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인가? 하나님의 뜻은『옛옷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을 갈아입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옷을 갈아입지 않고,『죄송합니다』라고 말만 반복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 못박히지 않으면서, 예수의 피만 믿고 있는 것이다.
거듭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하나님이 믿는다고 하는 사람을 버리는 이유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먼저 주님의 뜻을 버리기 때문이다. 주님의 뜻은 세상에 대해서 못박히고, 나 또한 세상을 못박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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