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빌립보서 3장 1-6절)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감옥에 있다. 감옥에 갇혀 신체의 자유를 제한당한 상태에 있게 되면 몸은 물론 마음도 힘들어진다. 디모데후서1장 15절을 참고하면,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바울의 영향으로 예수 믿은 그 당시 소아시아 지역 교인들)이 바울을 외면했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 바울을 우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 동안 자신의 수고가 헛된 게 아닌가 심란했을 것이다. 그 당시 디모데는 바로 그 소아시아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육체적으로 환란과 고난이 있을지라도 영원한 소망이 있으므로 기뻐하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2절에서 『삼가하라』고 세번이나 강조하고 있다.『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삼가하라』

개들에 대해서, 마태복음 7장 6절『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마태복음 15장 26-28절에서『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과 가나안 여자가 대화하는 내용이다. 가나안 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들렸는데,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애원했다. 그런데 15장 24절에서『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라고 하시면서 가나안 여인을 개라고 표현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알고 있었다.『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 속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 여인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 여인이『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응답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으로 전파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는 이방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개라고 표현할 때, 개의 습성을 나타낸다. 잠언 26장 11절에서『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이 말은 율법에서 자유함을 주었는데, 다시 율법에 얽매겨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는데,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에서 거룩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회개하여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율법을 지켜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복음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애굽으로부터 나왔는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들에게는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개들을 삼가고』의 대상은 종교적 의식이나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이 침투해서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지역과 고린도지역에 가서 선교할 당시에 그 지역엔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진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의 전통에 따라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배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게 된 유대인들 중에는 이방인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말을 듣고 이방인 그리스도인 중엔 할례를 받는 사람이 생겼다.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행악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행악자들은 구원을 왜곡시키는 자들이다.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다고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시대는 상대주의, 다원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상대주의는 하나의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고 각 지역문화에 나름대로 진리가 있다며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은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원이라고 하면 중심이 여러 개가 있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 믿어야만 구원 얻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만 구원의 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종교마다 진리를 가지고 있고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다. 

『몸을 상해하는 일』은 할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오늘 우리에게 할례 같은 의식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보다 어떤 종교의식이나 행위를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 교회 사람들은 행위로서가 아니라『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믿고 있다. 그렇게 믿고 있으면서도,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율법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이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을 하면서도, 율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을 행하는가? 그 이유는 예수와 함께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와 함께 율법에 대해서 죽지 않은 자는 율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에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골로새서2장11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할례는『손으로 하지 않는 할례,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다』라고 했다. 신명기 10장 16절에서『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의 할례를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로마서 2장 29절에서 마음의 할례를 말하고 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이 잇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그리스도의 할례는 육적 몸을 벗는 것이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과 연합하여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과 연합하여 함께 새생명(영의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 육적 몸을 벗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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