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립보서 3장 10-11절)『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리스도를 믿음는 믿음은 하나님께로 난 의와 일치한다. 내가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다. 이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게 위해서는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삶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말씀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 바로『옛사람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였지만, 구한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자 했다. 회개하는 자는 그리스도로 부터 무엇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얻고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는 것이다. 주님은『회개하라』고 했지『나를 믿으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욥은 자식이 다 죽고 재산이 다 날라가는 그런 상황을 맞이 했는데, 주님이 허락하셨다. 왜냐하면 그런 고통 속에서,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깨닫고『회개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욥이 오직 주님 만을 바라보고 살게 하신 것이다. 친구들은 욥의 신앙을 의심하고, 아내도 욥의 신앙을 비웃고 아무도 자신과 함께 하지 않을 때 오직 주님 만을 바라보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 욥에게 구속자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것이다. 욥기 42장 5-6절에서『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도 어떤 고통의 상황 속에 던져졌다면, 주님 만을 바라보며,『왜 나에게 이런 상황이 오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회개하라』는 메시지를 깨달을 때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것이다. 다윗은 그가 도망다니면서 쓴 기도가 시편이다. 다윗은『나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라고 고백했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나이까』라는 고백이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독백이 되어 솟아오르는 것이다. 시편 속에서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것을 본다. 요셉도 은 20십 냥에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고, 그의 아내의 거짓 증언으로 감옥에 갇혀버렸지만 그 곳에서 회개하므로 그리스도가 계시되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사밧은 전쟁 중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엔게디까지 왔다. 육로로 거리가 얼마되지 않지만 어마어마한 적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전쟁 준비도 제대로 된 것도 없고, 지혜롭지도 못한 것을 주님께 고하고, 오직 주만을 바라본다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상황의 해결을 위해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주만 바라볼 때 그리스도가 계시된다. 그리스도가 계시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에 보면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죽으러 가는 도중에 하나님이 바다에서『유라굴라』라는 광풍을 주셨다. 낮에는 해가 안보이고 밤에는 별이 안 보이는 광풍이었다. 우리도 그와 같은 광풍을 만난다면 그 속에서 예수를 아는 길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 광풍을 피하고 좋은 환경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좋은 환경 속에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빌립보서 3장 8-11절도 이런 의미가 숨어있는 것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주님을 체험하고 순종하는 삶을 산다면『유라굴라』라는 광풍이 몰려오든, 수많은 적이 쳐들어오던 상관없는 것이다. 오늘 죽어도 그날이 영생이 되기 때문이다. 이게 바울이 구한 인생이었다. 바울은 광풍이 몰아칠 때, 쇠사슬에 묶여있었다. 그러나 그는『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주를 믿노라』라고 고백했다. 주님은 그 가운데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넘어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는 길로 인도하신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0-11절에서『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말씀하는 내용이 된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주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유익하고 좋은 것이 아니라, 주님 보시기에 유익한 길로 가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이것을 구하라고 편지를 쓰는 것이다. 바울은 다소지방에서 태어나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고,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전도가 창창한 젊은 청년이었지만 그곳에서는 그리스도가 그에게는 없었다. 자기는 주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주님을 핍박하는 자였던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며, 예배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주님을 핍박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누가 교회 안에서 주님을 핍박하는 자가 되는가? 사탄의 말을 따라가는 자가 될 것이다. 누가 따라가는가? 거짓복음을 전하거나 그것을 믿고 따라가는 자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 죽음의 계시 안으로 들어가게 하지 못하게 하거나, 들어가지 않는 모든 자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길은 오직 하나,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길이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다. 왕궁의 다윗이 아니라 광야에서 도망다니는 다윗, 옥에 갇힌 요셉, 모든 것을 잃어버린 욥에게 그리스도가 계시될 때, 비로소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육신적인 성공을 위하여 소원하는 자가 있다면 주님과 원수가 될 수 있다. 오직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삶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삶,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삶을 살아갈 때, 옛사람은 죽어버리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서 주를 영접하는 자가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처음 나오는 사람에게 주를 영접하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쉽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회개하여 거듭나지 않으면 주를 영접할 수 없다. 거듭나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삶이 된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주를 영접할 수 있는가? 교회의 확장을 위해 이런 무모한 말들을 쏟아낸다면 그리스도를 못박는 자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히는 자가 되어야만 그리스도의 계시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옛사람이 죽어야만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계시해주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쓴 편지처럼『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를 기억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해로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옛사람이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께서 옛사람을 해로 여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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