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바
(빌립보서 3장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구약성경을 읽고 통달했고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가 메시야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의 내적 생명은 예수믿는 자들을 잡아죽이고자 하는 생명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읽은 성경때문이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율법이었다. 그는 율법 가운데 메시야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키면서 메시야를 기다렸더니 그 메시야를 죽여버린 것이다. 율법이 그렇게 한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게된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이 나는 율법에서 벗어나 성령의 법을 따르고 있다고 말은 하나, 회개하지 않은 모든 자들은 갈라디아서 3장 23절처럼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에 매여있다.
주님은 그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다메섹에서 자신을 나타내주셨다.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이 처럼 율법에 둘러싸여 있는 자들은 사울과 같이 성경에 통달한 자라도, 예수를 핍박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주님은 고난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신다.
예수님은 예수 때문에 사울에 잡혀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오늘날도 예수 때문에 핍박받는 그들과 함께 있다. 핍박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신앙과 아무런 상관없는 자가 아니라, 자아가 죽지 않은 채 회개하지 않고『스스로 예수믿는다고 고백하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자들일 것이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그 때 사울은 놀랬다. 충격적이었고, 눈이 멀었던 것이다. 이런 사울이 바울로 변화되고 심지어는 고린도후서에서 말한 대로 셋째 하늘을 보고 왔다. 그런데 상세하게 간증하지 않았다. 그가 알고자 하는 것은 다메섹 체험, 셋째 하늘에 다녀온 것 등 이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그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대해 기록했다. 그가 어떻게 부활을 만났는지, 그리고 이 땅에 남아있는 부활의 증인들과 부활의 영적인 원리에 대해서 기록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은 썩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나는 날마다 죽노라』였다. 성령받아서『날마다 살리라』가 아니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십자가는 세례받을 때 필요한 것 정도로, 십자가는 구원을 위한 도구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서 성령세례 받으려고 애쓰는 것도 본다. 성령은 회개하는 자에게 주신다. 주님은『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라』라고 했다. 제자가 되어야지 진리가 자유케한다. 제자가 안되면 머리로만 알고있는 것이지 그것이 작동되지 않는다. 아무리 진리를 암송해도 그것이 작동되지 않는다. 진리를 체험할 때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한다. 『진리를 안다는 말은 체험하고 경험한다』는 말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십자가가 진리가 되며 자유케한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다. 바울은『날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했다.
세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것이다. 그 날부터 날마다 구하는 것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날마다이다. 사람들은 세례받고 성령을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종료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구원이 완성된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바울이 말했다.『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에서『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는 부활에 이르지 않았다는 말인가? 구원이 시작되었다면 구원을 계속 이루어가야만 한다.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교회 나온지 얼마되지 않은 자에게 죄를 고백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었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리고『주님은 당신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확증적이고 즉시 받는 구원을 말하기를 좋아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모든 죄를 사하심을 받았으므로 세상에서 죄 짓는 것을 통애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나와서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죄를 사하심을 받으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가 머리 속에 습득된 자들이고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은 아담이 하와를 안다는 그런 아는 것이다. 십자가는 죄를 면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는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서 죽어야만 한다. 죄에 대해서 죽는 자는 죄의 근원을 생각한다. 그러나 죄 사하심을 얻으려고 하는 자는 죄의 열매를 바라본다. 죄의 근원을 생각하는 자는 탐욕의 원인이 자아라는 것을 깨닫지만, 죄의 열매를 바라보는 자는 그 열매만 제거하면 거룩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죄의 열매를 바라보는 자는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요 진리를 모르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진리를 모르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다.
진리에 서 있는 자들은 구원이 너무 귀해서 구원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어가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 날에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서 있지 못하는 자는 죄를 짓고, 회개하고 또 죄 용서받고, 그 때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을 계속 반복한다. 죄를 회개할 때 마다 마음 속으로『나는 구원을 받은 자』라고 되내인다. 마치 자신에게 최면을 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 모든 죄는 『내 노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만 용서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믿는 믿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세상에 죽으러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선물과 만나야만 한다. 나의 일방적인 믿음은 역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선물과 만나야만 한다. 그 속에 자아가 죽어야만 하는 회개가 만남의 문을 여는 열쇠 고리다. 이 열쇠 고리가 물과 성령의 거듭나는 것이다. 물은 내 자아가 물에서 죽는 믿음이고, 성령은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선물이다. 두가지 믿음이 만나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례의 원리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바로 두 믿음의 열쇠고리다. 그런데 많은 교회 사람들은 이 열쇠 고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듯하다. 혼자서 구원받았다고 확신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그 날에 주여 주여 부르짖어도 주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열쇠 고리인 날마다 자아가 죽는『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할 때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된다. 내가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이 예수의 십자가와 연합을 이루게 해 주신다. 이것이 선물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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