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립보서 4장 8-9절)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무엇에든지 참되며』라는 말씀은 위선과 외식과 가식과 거짓과 허례가 없이 진실한 상태를 말한다. 로마서 3장 4절에 보면,『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참된 자가 되라는 것이다.
『무엇에든지 경건하며』사도 바울은 경건이란 표현을 디모데 전서와 디도서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사도 바울만이 사용한 성경의 용어이다. 디모데 전서 3장 8절과 11절에 보면 남녀 집사들에게 이 표현을 사용하면서 respect 즉 정중하고 정숙하며 존경 받을 만한 생활을 하여야 할 것을 분부하였다. 디도서 2장 2절에도 같은 표현을 썼다. 성도가 기도 생활을 성실히 하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경건함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강조하였다. 경건함과 단정함이란 즉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는 것을 말한다.
『무엇에든지 옳으며』하나님 만이 선하시다. 하나님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저울은 항상 수평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잣대는 언제나 모자람이 없으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어디서나 옳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영원히 누구에게나 항상 옳은 사랑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영을 찾기 위함이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래서 좌편 강도의 조롱을 뛰어 넘는 사랑의 죽으심이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옳은 죽으심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옳은 사랑은 로마 병정들의 못 박는 못으로도, 옆구리를 찌르는 창으로도 죽일 수 없는 사랑이셨다. 예수님의 옳은 사랑과 옳은 자비와 옳은 긍휼과 그 온유하심과 겸손하심은 그 어떤 힘으로도 짓밟거나 없애 버릴 수 없는 영원한 능력이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그 옳으신 길과 진리와 생명의 능력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인간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이와 같이 된다.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될 때, 이렇게 된다.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정결하다는 말은 『하그노스』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쓸 수 있는 깨끗한 제물의 상태를 의미한다. 구약시대에는 흠이 있는 짐승을 제물로 드릴 수 없었다. 오직 깨끗하고 흠 없는 짐승만 드렸다. 그러므로 성도가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멸해질 때만 정결하게 된다.『더럽고 추한 생각을 버리고 깨끗하고 정결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다. 오직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가 되어야만 한다.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이 표현은 신약성경 전체에 이곳에 단 한번 만 나오는 유일한 표현이다. 사도 바울은 『즐겁고 유쾌하며 사랑스러운 삶』의 모습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을 말한다. 즉 자기를 낮추는 삶이다.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하나님께 칭찬받는 일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일일 것이다. 참 생명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일이된다. 세상을 함부로 막 살지 않고 고상하게, 칭찬 받을 만하게, 좋은 평판이 있도록 근신하고 삼가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나의 삶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 맡은 달란트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무슨 덕이 있든지』라는 말씀은 잃어버린 영을 살리는 일을 통해서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 시켜 나갈 때, 덕이 되는 것이다.
『무슨 기림이 있든지』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음 세대에 본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도덕적으로 높고 고상한 삶을 살아서 대대로 칭찬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삶,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통해서 후대들이 보고 배우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자신도 죽은 것을 믿는 삶이다. 죄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죽은 것을 믿는 것이다. 로마서 6장 7절에서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빌립보서 3장 8절의 말씀이다.『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가장 귀한 삶이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얻어야만 한다. 그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다. 예수를 얻는 것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하나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아니다. 교회 사람들은 어떤 예수를 믿는지 알 수 없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 어떤 예수인가?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하나가 되지 못하면, 다 십자가에서 도망가버리는 자가 되며,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것도 없는 자가 된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새로 지으심』과 고린도후서의『새로운 피조물』은 같은 말씀이다. 새창조의 피조물이 되는 것이 구원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잠자는 자의 첫 열매셨다. 새 창조의 시작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로 된 생명은 죽음 안에 있게 된다. 그러나 영생은 예수님의 부활하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게 거듭난 자다.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거듭난 자도 부활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이 부활이 된다. 거듭남은 새 피조물이요, 새 창조가 된다. 거듭난 자가 새하늘과 새땅에 거하게 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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