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장 12-14절)『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여기에서 서로 마주보는 내용이 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이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니』믿는 자의 입장에서는『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오늘날에 많은 교회는 이런 쌍방의 말씀을 하지 않고,『믿음만 가지면 모두 구원받는다』고 말들을 한다. 

성경에는 병 고침도 구원이라는 말을 하고 여러 군데 구원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영의 구원에 대해서『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의 행동이 서로 다른데,『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 이 모순 속의 거짓 구원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0장 1-5절에서『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신령한 음료는 바로 성령을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광야에서 멸망당했다』는 말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들을 따랐다는 말이다.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그리스도로 부터 마셨다고 그것이 구원의 동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이것을 주의하고 두려워하라』고 했다. 멸망한 이유를 10장 7-10절에서 우상숭배, 간음, 시험, 원망의 네가지로 말한다. 그래서 9장 27절에서『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바울이 복음을 전파한 다음에『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주의했다』고 말했다.『자기 구원의 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했다』는 말이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고린도전서 2장 2절『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린도교회에서 세례받은 자들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이 교회에는 은사를 받은 자들도 많았는데, 왜 부활도 말하지 않는가?

바울은 다메섹에서 주님의 우편보좌 영광을 보았는데,『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우리가 믿으면 맛나를 먹고, 믿는 만큼 신령한 음료를 마시고 성령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회개는 오직 십자가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3절에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라고 했다.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능력과 사랑과 큰 확신으로 너희에게 왔다고 말하는데, 왜 고린도교회에서는 이런 말을 하는가? 바울은 회개에 대한 자세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서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 가면 회개에 대해서 말을 하는데, 고린도후서 7장 8절에서『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바울의 말을 거절한 사람들은 다 나갔다. 7장 10절에서『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회개는 증상이 있다. 11절에서『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이게 회개의 과정이고 증상이다. 

지적으로 진지한 마음으로 믿고 영접해서『내 안에 들어오시옵소서』라 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창조하신 주님을 말할 때에 적용된다. 주님은 성막과 성전 안에만 계셨다.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주님은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이 땅에서 죄악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휘장이 찟어졌다. 이 사건 이후에는 그 곳에 계시지 않는다. 회개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 안에 거하신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성전이 되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복음의 첫째는 회개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 그것은 내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은 회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러므로 회개한 적도 없으면서 예수 믿으므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삶은 다 자신이 주인이면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 나오는 것은 모두 육신적인 생각이면서 거듭났다고 생각한다. 생명이 이스마엘이다.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나 진짜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 내 뜻대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회개하지 않은 증거다. 왜 벌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떨리게 하는가? 우리가 죄 아래 있고,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을 주님이 참 빛을 비추어 주어서 보이기 때문에 못견디는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이 모이는 곳이다. 성도는 회개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많은 교회가 회개를 말하지 않고, 또 회개하지도 않은데 그냥 성도라고 말하기 때문에 가짜교회들이 많은 것이다. 사도바울의 서신을 보면 교회들 마다 죄악의 양상이 있다. 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개하면 주님이 믿음을 주신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사람들은『믿기는 믿는데, 회개가 잘 안된다』라고 한다.『회개는 주님이 도와주셔야만 된다』라고 말을 하는 자들도 있다. 이런 거짓된 교리가 왜 생겨났는가? 주님이 도와주시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회개한 자의 믿음이다. 죄인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회개 뿐이다. 그런데 회개를 하려고 해도 할 수도 없고, 복종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계속 모순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해도 응답이 안되는 것이다. 아무 열매도 없고, 그냥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가지고 회개를 하려고 한다. 그것은 죄의 열매다. 죄의 뿌리를 가지고 회개를 해야만 한다. 죄의 뿌리 안에는 우상과 간음과 원망과 분노, 시험 등이 숨어있다. 죄의 결과를 가지고 회개를 할 것이 아니라, 죄인됨을 회개를 해야 한다. 죄인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죽는 것을 예수님에게만 맡기고 자신은 그대로이다. 왜 자신은 죽지 않은가? 자기가 주인됨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한다. 이것이 회개다. 그래야 주인이 바뀌게 된다. 이것은 오직 회개의 열매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누가 주인인가? 회개하지 않은 죽은 행실, 죽은 말 들은 다 죽은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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