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로새서2장 13-15절)『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사도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할례를 그리스도와 연계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육적 죄들의 몸을 벗는 것이라고 했다. 옷을 벗는 것은 성경에서 죽음을 가르킨다. 육신의 장막을 벗게되면 하늘에 있는 장막을 입게된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옛사람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리고『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옛사람의 죽음이고,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케 하신 하나님이 예수를 무덤에서 살리신 것 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우리를 다시 일으키신다는 말씀이다.
구약에서 할례를 최초로 약속을 받은 자는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에게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창세기 12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아브라함이 순종을 한다. 놀라운 일이다. 고향을 떠나 전혀 알 수 없는 땅으로 가는데, 그러나 이것이 구원은 아니라 구원의 시작일 뿐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조카인 롯을 데리고 나온다. 하나님은 친척도 떠나라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완전한 순종을 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순종하지 않는 존재다.
철저하게 나 자신이 주인인 것이다. 구원의 시작은 회개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창세기 13장에서는 조카 롯과의 문제가 생긴다. 창세기 13장 8절에서『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라고 한다. 회개하는 사람은 이기려고 다투지 않는다. 시기와 다툼은 육적인 증거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친척으로 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재물을 잘라라』고 하신다. 재물을 쪼갰더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태워버린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롯을 전쟁으로 부터 건져주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멜기세덱을 만나게 해 주는데, 그래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영적인 예배를 체험한다. 그래도 아브라함은 바뀌지 않는다. 15-16장에서는 하나님이 많은 자손을 허락하셨는데도 아브라함은 사라 대신 여종 하갈을 취하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현실적인 대안을 찾게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면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정도만 되어도 구원받았다고 현대 교회에서 선포하는게 현실이다.
거짓말이다. 성경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신다. 멜기세덱을 만났다는 영적인 체험을 해도 구원은 아닌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는다.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란을 떠난 후 11년 만의 일이다. 86세가 되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 이스마엘을 낳았던 것이다.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의의 말씀이다. 먼저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리지 못하는 그런 믿음은 가짜 믿음이다. 죽어가는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살려내야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를 세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모든 족속을 제자를 삼아 아버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또 말씀하시기를『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끄러워 하면 나도 내 아버지와 천사 앞에서 너희를 부끄러워 하리라』라고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다.
초기의 구원의 시작은 의를 얻게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했다. 아브라함이 언제 의를 얻게되는가가 아브라함의 구원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영접기도는 거짓이다. 거듭난 자 외에는 하나님을 영접할 수 없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회개는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매일 살다가 잘못을 저지러고 잘못을 반성하는 회개가 아니라 아예 육적인 옛사람(자아)를 벗어버리는 것이 회개라는 말이다. 옛사람이 죽지 않는데, 날마다 회개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회개하지 않으면 거듭나는 믿음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육적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죽음의 언약 속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구원은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음성도 들려주지 않았다. 이스마엘이 13세가 되었을 때 성인이 되어 성년식을 하고 난 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내 앞에서 완전하라』라고 하시면서 할례를 말씀하시고『이제부터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고 사래가 아니라 사라』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신 것이다. 할례를 말씀하셨으므로 이스마엘은 13세에 할례를 하게된다. 할례를 말한 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아브라함아 내년에 자녀를 주겠다』라고 하니 아브라함이 속으로 엎드려 웃으며『제가 100세가 되고 사라가 90세인데 어찌 자녀를 생산하리요』라고 웃은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면 죽는다』라는 생각과 다를 바가 없는 육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내 생각대로 습관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고 있으므로 신앙이 아닌 종교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개입할 틈이 없으므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이스마엘의 생명과도 같은 믿음이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무슨 말을 해도 내 방법 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스마엘은 이삭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을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다. 이스마엘은 내어 쫒아야 한다. 이스마엘은 옛사람이다. 내어 쫒아야 한다. 나의 믿음은 이스마엘의 생명인가 아니면 이삭의 생명인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이스마엘이나 살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전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도가 없는 것이다. 음성을 듣는데도 순종이 없는 것이다. 육신적 죄의 몸을 벗지 않으면 이스마엘을 택할 수 밖에 없게된다.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살아온 모든 자아(옛사람)가 바로 죄의 원흉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회개가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세례의 의미도 모르면서 세례를 주고 받는 현실이다. 세례는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서 말하고 있다.『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대부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를 용서받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죄는 용서가 아니라 죽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대속의 의미를 갖는다. 피값으로 사단으로 부터 우리를 사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우리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야만 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로마서 6장 3-6절에서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다른 예수를 전하는 복음은 부셔져야 한다. 이스마앨처럼 부셔져야 한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에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이스마엘과 같은 믿음은 거짓된 복음이다. 이스마엘은 이삭을 괴롭히는 자이다. 야곱을 대적하고 에서를 도와주는 신앙이 이스마엘이다. 이스마엘은 구원받지 못한다. 우리가 이스마엘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상황에 반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해야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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