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히브리서 3장 7-19절)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모세는 하나님의 신실한 일꾼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유대인들에게 모세는 특별한 존재였다. 유대인이 최고로 여기는 율법과 모세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는 섬김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모세를 불러 세운 분은 하나님이셨고, 율법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모세는 단지 주님의 통로였다. 율법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시기에,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행한 일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 다시 말해, 모세는 장차 도래할 예수와 그 복음을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전하는 소개자였다. 그것이 모세의 역할이었다. 

모세는 집의 일부였지만, 예수님은 그 집을 지으신 분이셨다. 즉 모세가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 백성의 일원이었지만, 그 백성을 지은 이는 예수님이시다. 지음을 받은 이는 당연히 지은이에게 그 목적이 맞추어져 있다. 유대인들은 이를 알지 못했다. 즉 율법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 그러기에 모세의 궁극적인 대상이 되신 예수님이 아닌, 모세라는 한 사람을 모든 대상의 우선으로 삼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여전히 범하기 쉬운 일 중의 하나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감동을 주고, 좋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사람을, 그 어떤 사물을 부지중에 목적 삼는 경우가 있다. 기쁨과 감동, 좋은 영향 등의 궁극적인 귀결점은 인간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임에도 그것의 귀결점을 보지 못하고, 때론 그것 자체를 목적 삼는 우를 범할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람을 우상 삼기도 하고, 사물을 우상 삼기도 한다.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선될 수 없고, 우선되어서도 안된다.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 말한다. 이 말은 예수님은 인간의 대표자가 되신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간을 대표하고, 인간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만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초월하는 강한 힘으로 우리를 붙드시어, 실패가 아닌 궁극적인 선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상황을 묵상하면 할수록, 상황이 주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지만,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그분이 나에게 어떤 분이 되시는지를, 그분이 내 삶을 어떤 힘으로 강력하게 붙들고 계시는지를 더 깊이 경험하게 되실 것이다.

출애굽 일 세대들은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고 경험하면서도, 오히려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였고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이어졌다. 이 이야기를 한 번 더 강조하여 언급하며,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성경에서 구원받는 믿음은 신약의 그림자인 구약의 출애굽에서 주로설명된다. 광야에서 주님을 믿고 가나안을 들어간 자가 구원받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택한 자의 믿음이다. 히브리 백성의 영적인 상태는 우리의 영적 그림자다. 애굽에서 사는 것이 그들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사는지를 몰랐다. 그래서 그 속에서 인생의 목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부르짖으므로 주님이 모세를 보내서 그들을 애굽으로 부터 나오게 하시고『내 백성으로 예배하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예배는 애굽에서 걸어서 사흘 길 이상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와 삼일 뒤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어린양의 피를 칠하게 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데, 진노를 피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린양의 고기를 먹고 아침에 홍해바다가 갈라져서 건너 광야로 들어가게 된다. 그 날로부터 육십만명이 매일 만나를 먹었다. 육일째는 이틀분을 거두는데, 지나고 나면 말라버리는 것이다. 매일 매일 먹어야만 했다. 신약에서는 매일 매일 그리스도를 의지하라는 뜻이다. 어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만 한다. 어제의 기적이 있었어도 어제는 지나간 것이다. 어제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어도 오늘 풍랑치면 제자들처럼 다 무서워 떨게 된다. 

우리도 어제까지의 좋은 믿음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부터 붙잡는 믿음이 중요하다. 그렇게 히브리 백성들이 광야에서 1년을 지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하셨다. 매일 매일이 기적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것을 믿음이라 하지 않는다. 모세가 40일간 약속한 땅에서 지켜야 할 율법을 받았는데, 율법을 가르치시고 성막에서 지킬 것을 가르치셨다. 성막은 하늘의 모형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땅을 정탐하라는 것이다. 열두지파의 대표가 40일간 보고 왔는데, 정탐꾼이 다녀와서 열명은『들어가면 죽는다』라는 것이다. 그들은 지파의 대표로서 정탐하기 전까지는 믿음이 가장 좋았던 사람들이다. 

오늘날 대부분 교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의 믿음을 구원받은 믿음이라고 말할 것이다. 기적을 경험하거나 영적 체험을 했다면 구원받은 믿음이라고 말할 것이다. 어린양의 피를 칠해서 세상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구원받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가나안 뿐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미혹되어 있는 것이다. 어린양의 피를 칠하면 다 구원받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자의 소리가 모세로부터 세례요한까지 있었다. 그게 율법이었다. 율법 앞에서 하나님의 기준을 알게되므로 죽을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수많은 기적을 보여주시고, 열두제자를 택하셨다. 열두제자는 당연히 예수님을 믿었다. 그들은 제자가 되어 병고치는 능력과 귀신쫒는 권세를 받았다. 주님은『귀신이 쫒겨 나가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을 기뻐하라』고 하셨다. 삼년 동안 베드로처럼 기적을 많이 경험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3장에서는『지금은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다』베드로가『주여 지금은 어찌하여 당신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라고 물었다.『나는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까지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한 것이 믿음은 아닌 것이다. 주님은『오늘밤 너는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많은 교회사람들이『내가 믿으면 구원받는 믿음이라』고 선언한다. 자기부인의 회개없는 영접기도, 결단카드는 거짓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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