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
(히브리서 5장 1-10절)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체 13장중에 1장부터 10장 18절까지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라는 교리적인 부분이라면, 10장 19절부터 마지막 13장 25절까지는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우리 삶에 대한 실제적인 권면의 말씀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 권면의 말씀 가운데에는 믿음장이라 불리우는 히브리서 11장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히브리서를 보통 믿음의 서신, 권면의 서신이라 부른다. 특히, 히브리서 전반부에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탁월성이라는 측면에 포커스를 맞추어 당시 히브리인들에게,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4장 14절에서 7장 18절까지는 레위 제사장들과 비교하여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우월성에 대해 논증하는 기사인 반면, 5장 1-10절은 좀 더 좁혀서 아론 후손의 대제사장직과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교차 대구 구조를 통해 각각 일대일로 직접 비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우월성을 선명히 밝혀 주고 있다.
예수님과 비교의 대상이 된 아론 후손의 대제사장들의 모습은 본질적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 임명을 받는 인간이라는 것이며,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인간 대제사장으로서의 불완전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연약함이고 자신의 죄를 해결 못하기에 자신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만 하는 한계다. 또한, 부르심이 있어야 했다. 물론 이 부르심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하나님의 소명으로 대제사장직을 받고, 하나님의 뜻에 따른 대제사장직을 수행해야만 하는 책임이 있었다.
이어서 5-10절 말씀을 통해 앞에서 언급한 대제사장의 자격을 예수님께 적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아론의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스스로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임명에 의해 대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간의 몸으로 계셨지만 그분은 인간 대제사장과는 달리 완전한 분이셨기에, 우리 모두를 영원한 구원으로 이끄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대제사장이 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반차는 계열, 계통, 서열 등으로 해석되는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하신 분이라는 것과 더불어, 인간 대제사장과는 분명히 다른 예수님의 우월성을 드러내 주는 부분이다. 왜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아론 후손의 대제사장들과 비교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인가? 그것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민족종교, 유대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러한 현실을 그들에게 익숙한 구약의 말씀들을 인용하면서 선명히 밝혀주고 있는 것이고, 본문 11-14절을 통해서 당시 히브리인들의 영적 상태를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멜기세덱은 성경에 단 한 번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평화의 왕이며, 율법이 공포되기 이전의 인물이며,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완전함을 상징하는 예표적 인물이다. 특히,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맞으러 나왔다는 진술 직후, 성경은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창 14:18)이라고까지 증거하고 있다. 그와 같은 신비로운 인물을 히브리서 기자는 할 말이 많지만 더 이상 말하기를 꺼려한다. 이유는 그들의 귀가 둔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야기를 한들 지금의 그들의 영적 상태로는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귀가 둔해진 그들에게 보다 더 구체적인 실상을 폭로하고 있다.『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바로 영적으로 어린아이임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기는 자의 것이다. 변화산에서의 사건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목격했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은 재림하실 때의 모습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헬라어로 죽으심(별세)이 엑스도스다. 베드로가 여기 초막(tabernacle) 세개를 지어서 모세와 엘리야도 천국에 돌아가지 말고 함께 살자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이기심의 모습이다. 은사를 추구하는 그곳에 영적 이기심이 함께 한다. 오늘날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영적 이기심의 집회가 많은 것을 본다.
예수님은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후에, 멜기세덱과 같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제자들에게『내가 유월절의 음식을 먹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멜기세덱이라는 말은『의의 왕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의의 왕으로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핵심적인 말이 바로 새언약과 멜기세덱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큰 대제사장이시다. 역대기 상에는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후보자가 24명 중 1-2명이었다. 멜기세덱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는 것은 휴거될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기는 자가 휴거될 것이다. 거듭난 자가 되지 않으면 휴거되지 못할 것이다. 거듭난 자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이전의 몸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박힌 자가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날마다 죽노라』는 말씀 속에서 싸우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미 패배의식을 조장하는 모습을 본다.
히브리서 12장 4-5절에서『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이 땅에서 탐욕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으면 다 넘어지는 자가 된다. 이기는 자가 되지 않으면 지는 자가 된다. 이기는가? 지는가? 둘 중의 하나다. 요한계시록 3장 5절에서『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싸움에서 지면 어떻게 되는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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