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9장 1-12절)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식을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는 구약시대 제사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대제사장이시다. 더 좋은 언약이란 새언약을 말하며 옛언약에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좋다는 의미다. 9장에서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구약시대 대제사장의 역할의 측면에서 히브리서 수신자인 유대인들을 고려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직과 비교해서 생각해 볼 때에 유사점과 차이점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새언약의 중보자이시기에 첫 언약이라는 옛언약과 새언약을 비교할 필요가 있었다. 8장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첫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새언약은 필요가 없었다. 첫 언약이 완벽하였더라면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첫 언약이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첫 언약이 불필요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 언약이 새 언약을 위한 모형(그림자)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첫 언약(옛언약)과 비교함에 있어서 구약시대 성막과 제사의식을 설명하고 있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첫 장막이라 함은 성소를 의미하며 둘째 장막인 지성소에 이르려면 반드시 첫 장막인 성소를 통과해야 했기에 첫 장막은 속죄를 위한 첫 관문과 통로의 장소였다. 성소는 거룩한 장소를 뜻한다. 지성소는 헬라어 하기오스를 두 번 반복해서 사용한 단어들의 번역이며, 히브리어 역시 코데쉬를 두 번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거룩함을 두 번 반복 사용함으로써 아주 거룩한 장소의 의미로 지성소로 번역하고 있다.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있는데 속죄소로 표현하고 있다. 언약궤의 덮개에는 날개 달린 그룹(cherub)들이 있는데 이 그룹들은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한 쌍의 천사들이다. 구약시대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딱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대제사장은 자신과 백성의 속죄를 위해 반드시 피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 피는 한 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피가 아니었다. 해마다 반복적으로 드려야 하는 한시적인 피일뿐이었다.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시고 새언약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해마다 반복적으로 드리는 짐승의 피가 아닌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유효한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짐승들의 피를 지성소에 뿌렸던 구약의 대제사장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를 지성소에 뿌려 하나님의 백성들의 속죄를 단번에 이루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속죄의식은 구약의 속죄의식과는 큰 차이가 있다. 첫째는 짐승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를 흘렸다. 둘째는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었다. 셋째는 한시적이고 반복적인 짐승의 피가 아닌 영원히 유효한 보혈의 피를 드렸다. 넷째는 예수님의 속죄의 피는 영원하고 완전하였기에 장막의 지성소가 더 이상 필요가 없도록 하여 구약시대의 속죄의식을 종결시켰다. 

구약시대의 장막은 비유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구약시대의 장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표하는 상징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친히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간의 죄를 속죄하는 희생의 피를 흘리셨고 더 이상 짐승의 피가 필요 없도록 하시어 구약의 장막을 없앴다. 신약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2천년 전에 흘리셨던 영원히 유효한 그 피로 성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속죄함을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의 초림은 세상의 종말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단번에 속죄의 피를 흘리시고,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아론의 후손 대제사장직을 폐지하시고 오직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세상의 끝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한다. 개인적 종말과 심판은 결코 피할 수 없다.『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죽음과 심판을 생각하는 자는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자다.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여기서 두 번째는 예수님의 재림을 뜻한다. 두 번째 나타남을 기대하는 자들은 속죄를 위해 지성소에 들어갔던 대제사장이 죽지 않고 나올 것을 기대하는 백성들의 마음과 같아야 한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백성의 마음은 곧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사해주셨음에 대한 기대감이다. 만약에 짐승의 피로써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대제사장은 지성소에서 죽어 나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보좌의 하나님께 세상의 모든 죄를 가지고 가셨으며, 재림하셔서 이 세상의 구원을 종결시키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예수님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자들은 마땅히 주님의 재림을 사모해야 하는데 아울러 함께 있을 심판도 의식하며 살아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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