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믿는다고 하지만 회개하고 거듭나지 않으면 세상을 더 사랑하고, 매일 죄를 짓고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 믿음은 거듭난 자에게 하시는 영생의 말씀이다. 14-15절에서는『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5절을 영어 성경과 비교하면 KJV는『That whosoever believeth in him should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NIV는『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may have eternal life』. 여기서 『멸망치 않고(should not perish)』가 빠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자가 들려있는 것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말이다. 인자가 들려있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들려있는 인자가 뱀에 물린 자』라는 것을 믿는다 라는 말씀이다. 서로 하나가 될 때 구원받는 믿음이 나오는 것을 말한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다. 니고데모는 여기에 답하지 않았다. 니고데모는 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다. 그 당시 아무도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않는 랍비들 중에서 찾아와『당신의 행하시는 기적을 보니, 당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요, 하나님이 보내신 분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답을 하지 않고『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거듭나는 의미를 모르는 니고데모는『인자가 들려야 하는 의미』를 몰랐던 것이다. 랍비였으므로 피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알았지만 죽음에서 하나가 되어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로마서 6장 3절에서『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베드로 전서 3장 21절에서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가? 물에서 죽고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8절에서 성령으로 난 자에 대해서 설명하신다.『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 후에 14-15절『인자가 들려야 하리니』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민수기의 말을 인용하신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어린양의 피를 칠하여 장자가 죽지 않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으로 보고 매일 맛나를 먹었다. 밤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보호해 주는 그런 놀라운 체험도 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길이 험하다고 원망했다. 그 때 맛나도 먹기 싫다고 원망했다. 그 때부터 일년 동안 주님이 심판하기 시작했다.
출애굽한지 1년쯤 지난 뒤 유월절을 지키고, 출애굽을 한지 2년 2월에 열 두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내는 일이 있었다. 주님이『가나안 땅을 주리라』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열 정탐꾼은『들어가면 죽는다 』라고 했다. 그들의 말 속에 하나님의 약속은 없었다. 자신들의 생각과 눈에 보이는 아낙 자손들 뿐이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단이 끼어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려고 하는데, 사단이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므로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사단의 무리를 멸하게 하시는 것인데, 그 뜻을 모르는 것이다. 나의 중심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구원을 생각해야만 알 수 있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으면, 구원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르심을 받은 자의 구원의 기회일 뿐이다. 구원의 확신은 『가나안 땅을 주리라』라는 약속을 믿고 들어가는 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에 섰을 때 구원의 확신이 있게된다. 요한복음 3장의 믿음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믿음과 동일하다. 주님은 열 정탐꾼에게『내가 맹세한다. 너희는 가나안에 못 들어간다』고 하셨다. 인간 중심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과 경험,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지식은『들어가면 죽는다』가 되는 것이다.
구원받는 믿음은 홍해바다를 경험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다. 히브리서 3장 16-17절에서『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라고 했다. 4장 1절에서는『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이게 열정탐꾼의 모습이다.
열 정탐꾼의 말을 듣고 약 60여만명이 울고 통곡했다. 주님이『너희 중에 전쟁에 할만한 자 20세 이상은 다 죽는다』라고 선언하셨다. 광야에서 회개하고 주님의 약속을 변치않고 애굽을 나올 때와 동일하게 믿고 요단강을 건너가는 순종하는 자들의 믿음이 바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말하는 바『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그 믿음이다. 이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믿음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문제는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성령을 따라 난 이삭과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처럼 평행선을 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내산에 올라가면 죽는다고 생각하지만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것은 쉽게 생각한다.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나를 대신해 죽은 그냥 쳐다보는 십자가이지, 그 죽은 예수가 나였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자는 별로 없는 것이다. 십자가를 누구든지 붙들면 구원받는 식이다. 붙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예수와 함께 달려 죽어야만 한다.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한 죽은 예수가 나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 처참하게 죽은 예수를 바라보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나를 깨닫지 않으면 예수와 함께 달려 죽을 수 없다.
육신적 자기가 주인인 사람은 가나안 앞에서는 하나님 약속이 보이지 않는다. 약속은 영에 속한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다. 구원받은 믿음은 주인이 바뀌는 회개한 자 뿐이다. 예수가 주인은 사람 만 구원받는다. 예수가 주인이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와 함께 죽은 자다.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공의다. 인간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서 갇혀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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