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요한복음 11장 33-44절)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나사로가 병이 들어서 죽게된 것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잘 알아야만 한다. 요한계시록 21장 23절에서『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여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빛이시다. 출애굽기 34장 29절에서『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이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서 대비적으로 설명한다.『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하나님은 빛이신데, 그 영광의 빛이 사람에게 비춰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그래서 그리스도로 인해서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빛)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되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므로, 과실을 맺게 된다. 요한복음 15장 8절에서『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5장 8절에서『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를 떠나서 제 갈길로 갔던 아들이 죽은 것 같이 되어 돌아오므로 아버지가 기뻐하여, 아들로 인해서 아버지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다는 이야기다. 아버지에게 영광이 되는 것은 집을 떠난 아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세상의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죽었던 영이 살아서 돌아올 때 영광을 받으신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나사로의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나사로의 누이들이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오라비가 죽게 되었다고 살려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때까지 며칠을 더 지체하게 된다. 나사로는 죽어서 장사되고 무덤에 들어가게 되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른 지역을 방문했다가 베다니에 있는 죽은 나사로의 집에 오게 된다. 요한복음 11장 17절에서『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통해서 부활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것이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을 통해서 부활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과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다. 나사로의 죽음은 소생이라고 할 수 있다. 소생한 몸은 다시 죽는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은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사로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부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죽음을 나타내기 위해 죽은지 나흘이 지나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그런데 나사로의 누이들(마르다와 마리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든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그런 예수라고는 도무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11장 37절에서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는 예수님께 원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요한복음 11장 26절에서『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그렇게 말하고 마르다는 예수님께 오라버니가 장차 부활시켜 주실 것을 구한다. 11장 27절에서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그래서 예수님이 『너의 오라비가 다시 살아난다』라고 말하자, 마르다는 11장 28절에서『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했다. 나사로의 누이들은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부활은 죽은 후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늘 생각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통해서 제자들과 나사로의 누이들에게 현재적 부활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여기서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는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고(태어나고), 영의 몸으로 살아나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예수님이 니고데모라는 사람과 대화할 때,『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다. 물에서 육의 몸(옛사람)이 죽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은 현재적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육체가 죽어서 장차 부활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부활하는 것이 거듭남이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늘에 앉히운바 되었고, 감추어져 있다』라고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말하고 있다. 오늘날 부활에 대해서 잘못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육체가 부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영이 영의 몸을 입고 부활하여 살아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은 죽기 전의 육체가 아니라 영의 몸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벽을 뚫고 제자들에게 갑자기 들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부활과 거듭남을 다른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첫 부활의 열매이고,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열매들이 된다. 그리고 부활은 육이 죽어서 부활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못한 자들은 구약시대에 죽은 자들의 부활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적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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